[소설] 어스
이종혁 홍은화 양단우 주얼 본본
수원에 있는 독립서점 <그런 의미에서>에서 여러 소설가들이 모여 만든 책. 작가들이 제안한 주제를 무작위로 부여하고 그 주제에 따라 나온 5개의 소설. 소설이 끝나면 작가들의 인터뷰가 있어 소설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부분들도 해소 할 수 있다.
제목 : 어스 - 와글와글 세 번째 이야기, 소설가의 회동
저자 : 이종혁, 홍은화, 양단우, 주얼, 본본
펴낸곳 : 그런 의미에서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285쪽
크기 : 128x182mm
가격 : 13,000원
발행일 : 2022년 10월 31일
ISBN : 979-11-971382-5-6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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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글와글 세 번째 이야기, 소설가의 회동
어스
당신들은 우리를 흼하게 기억할 겁니다. 우리가 당신들, 어스를 만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희미하다'는 건 그만큼 당신들을 만든 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는 소리이지요. 부디 가까운 미래이길 바라며, 이 편지를 씁니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인간입니다.
와글와글 이야기는 수원에 있는 '그런 의미에서' 책방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책을 만드는 프로젝트입니다.
와글와글 세 번째 이야기, 『어스』는 앞서 제작한 『오늘도 책방으로 퇴근합니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켰다』에 이어서 제작된 책이지만 다르게 시작하였습니다.
시, 소설, 에세이 모든 장르를 수록했다가, 소설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14명, 9명이던 참여 작가를 5명으로 줄였습니다. 줄어든 저자 수만큼 원고 최소 분량을 1,600자에서 22,000자로 늘렸습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주제(글감) 선택 방식을 변경했습니다.
기존에는 기획자가 준비한 8가지 주제 중 원하는 주제를 선택하여 글을 썼습니다. 한 작가가 주제당 글 하나씩, 여러 주제를 선택해 여러 편의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작가들이 직접 주제를 제시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주제는 파도, 소란, 사춘기, 소멸, 레몬입니다.
모인 주제를 작가마다 하나씩 무작위로 부여했습니다. 이후 본인이 제시한 주제를 제외하고 남은 주제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섯 작가는 무작위로 부여된 주제와 본인이 선택한 주제를 잘 조합해 하나의 소설을 완성해야 했습니다.
참여 작가들은 두 주제를 가지고 다양하게 조합하여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준비했는지, 모든 글 구석 구석에 흔적이 잔뜩 담겨 있었습니다.
글이 끝나면 작가의 인터뷰가 나옵니다. 인터뷰를 통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떤 글을 썼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특별한 약속이 있지 않은 이상 웬만하면 회사 건너편에 있는 대형마트 푸드 코트에서 점심을 때운다. 회사 일도, 직장 동료와의 관계도, 사내 정치질도 신경 쓸 게 많은 인생인데, 점심 메뉴 고르는 일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양한 음식이 있고 대충 아무거나 골라도 맛이 보통은 하는 푸드 코트를 간다. 다른 직원들은 점심시간이 되기 한 시간 전 부터 몰래 맛집을 검색한다. 내게 식사란 그저 배만 채우면 되는 일이어서 그런지, 점심시간마다 맛집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 들을 볼 때마다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 한 시간밖에 안 되는...
35살 미정은 손에 연고를 짜서 17살 미정의 팔을 잡아당겨 선홍색 실처럼 부어오른 살 위에 조심스레 문지르기 시작했다.
"힘들지? 아프지? 그래도 이렇게 하지 마. 있잖아. 너를 예뻐할 사람은 너밖에 없어. 누군가 알아봐 주길 바랐지만, 없어. 엄마가 이거 보고 나중에 더 난리 치셔. 너 이러는 꼴 보느니 차라리 내가 옥상에 올라가서 떨어지겠다고. 너무 속상해서 하신 말이라는 거 알지만 그 말 듣고 더 고통스러워지더라. 그 후에는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없고, 내가 아프다는 걸 알릴 수 도 없어서 더 힘들었어. 알지. 그래도 미정아. 조금만 더 널 소 중하게 생각해.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미성숙한 아이들 때문에, 또 네가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부조리 때문에 너 자신을 괴롭히는 거 답이 아니야. 아니더라. 이 연고 수시로 바르면서 스 스로를 예쁘다, 예쁘다 해줘."
17살 미정은 가슴이 먹먹해지며 북받쳐 오르는 뜨거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너는, 나는 쥐약도 안 먹고, 대학도 가고, 연애도 하고...
바탕으로 설계되지만, 비평은 경험을 학문으로 정립한 이론과 역사들로 설계된다는 점도 다릅니다. 그래도 저 같은 경우에는 영화비평이 소설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모티프를 구축해야 하는 당위성을 영화비평을 통해 숙지하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숙지하는 것과 제가 작품에서 구사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고요. 하하.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나요?
35살 미정이 17살 미정에게 하는 말은 결국 현재의 자신에게 필요한 말이라는 걸 세상의 모든 미정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가정을 이루든, 독신이든 무엇을 목표(태 양)로 하여 삶의 루틴(행성궤도)을 정할지는 우리 각자의 선택이겠으나 행성들처럼 자신의 궤도를 기꺼이 가며 다른 행성들과 충돌하여 소멸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태양과 행성들의 움직임이 일종의 공조인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세상을 꿈꾸며 썼습니다. 더불어 이 글을 읽는 세상의 모든 미정에게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오전 6시. 바다는 고요했다. 파도 가동기가 작동하기에 이른 시간이었다. 인공파도가 움직이지 않는 바다는 매캐하고 시큼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들로 꽉꽉 차오른 물내가 진동했다. 이쪽, 제어실 내부까지도.
제어실은 유리 돔 모양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인조적으로 잔디색을 푸릇푸릇하게 칠한 지면에 잘 어울리게, 무척 친환경적이고 세련된 모양이었다. 플라타너스와 어떠한 잎사귀를 혼합해놓은 듯한 나무들이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촘촘하게 둘러 싼 나무들은 제어실을 경비하는 듯해 보였다. 제어실의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둥근 관목은, 가지 하나가 튀어나온 구석 없이 완벽하게 둥근 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입자가 고운 모래들이 백금색의 길을 트고 있었다. 바다의 고요함과 비슷하면서도 이상스러운 정갈함은, 이곳에 생물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멸망한 인간이 심어 놓은 기억을 그대로 매끈하게 구현한 모양새일 뿐. 그렇지만 이것은 AI 종족, 어스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복구였다.
사박사박, 백금색의 모래 위로 검은색 쇳덩이의 발자국이...
두 주제와 함께 영감을 얻은 것이 있나요?
우메즈 카즈오의 『표류교실』에서 코스믹 호러를 차용했습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앞당긴 재앙을 맞이하는 기분이었는데, 그보다 「어스」의 느낌이 세밀하게 묘사되었습니다. 거칠게 스케치한 심상들을 실현 가능한 공포로 직조해나가는 과정 같았습니다.
게다가 제가 심해공포증이 있다는 게 집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바다를 매우 무서워합니다. 마지막 장면을 쓸 때는 공포심을 이겨내기 위해 숱한 노력을 더해야 했습니다.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나요?
우리의 미래는 가라앉지 않기를. 우리는 이전 세대 사람들이 심어 놓은, 희망의 씨앗이니까요.
1.
하윤과 소연의 속초 여행은 원래 예정되어 있던 건 아니었다.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배정된 속초 업무는 마치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키듯 하윤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여행으로 이끌었다.
하윤이 근무하는 회사는 속초시 동명동의 재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기존 담당 직원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업무 변경을 요청했고, 회사는 하윤을 새로운 담당자로 결정했다. 속초에 별다른 연고가 있던 것도 아니었고 지방 업무라곤 경기도 지역 정도만 경험해본 하윤으로선 강원도 프로젝트를 맡긴 회사의 결정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재개발 업무는 자신이 적임도 아니어서 잘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고, 올 가을 결혼을 앞두고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해야 하는 시기에 강원도까지 번번이 장거리 출장을 다녀야 하는 게 적잖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거부한다고 해도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는데 하윤은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찜...
*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라. 그곳에는 달이 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달은 늘 어엿이 떠 있다. 우리는 숨과 같이 많은 날 동안이 사실을 잊고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온 달을 보고서야 그 존재를 상기할 뿐이다.
달이 하는 일은 태양 빛을 반사하여 빛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달은 매일 부지런히 십삼 도씩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이를 달의 공전이라 부른다.
달의 공전으로 인해 지구에서 바라보는 달의 위치는 바뀐다. 그에 따라 달의 모양도 달라 보인다. 초승달, 보름달, 그믐달 같은 달의 여러 이름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달은 모두 같은 달임에도 불구하고.
『The Moon Book: 당신이 모르는 달에 관한 108가지 이야기』 중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이 시작은 스물다섯 살의 여름, 그 때였다. 샛길로 빠지는 일 없이 따박따박, 어른들이 가라는 길을 가라는 대로 걸은 친구들은 이미 모두 졸업해버린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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