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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여름의 한가운데, 주얼

강다방 2023. 8. 13. 18:20

 

 

 

 

 

소설

여름의 한가운데, 주얼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과 같은 소설. 약간의 습함과 더움, 그리고 가을의 초입과 같은 선선함이 담겨있다. 5편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는데,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는 말 처럼 모든 이야기들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전작 <당신의 계절이 지나가면>, 후속작 <달이 뜨는 동쪽, 세상의 끝>과 함께 보면 더욱 좋다.

 

 

제목 : 여름의 한가운데
저자 : 주얼
펴낸곳 : 이스트엔드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223쪽
크기 : 135x200mm
가격 : 12,000원
발행일 : 2022년 1월 1일
ISBN : 979-11-977460-1-7 (03810)

 

 

이스트엔드 주얼 인스타그램

https://instagram.com/eastend_jueol

 

 

 

 

 

여름의 한가운데
주얼 단편소설

여기 실린 소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 머무름과 나아감 사이에서 방황했떤 기억에게 보내는 나의 애틋한 연서(戀書)이자 부끄러운 회고록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삶에 스며든 지난날의 기억과 함께 현재를 살아가는,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일지 모를 5편의 단편소설 수록

 

 

 

 

 

여름의 한가운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라고 말하며 주연은 자리에 앉자마자 연신 한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테이블 위의 냅킨을 뽑아 이마와 목덜미를 살짝살짝 두드리며 땀을 훔쳐냈다. 약속 시각에 늦으면 내가 또 잔소리라도 할까 봐 이런 날씨인데도 허겁지겁 걸어온 모양이었다. 오늘 점심을 먹기로 한 삼청동의 오래된 식당은 오후 3시까지만 영업을 하는 곳이었고, 우리는 각자 사정으로 2시에나 만남이 가능했기 때문에 여유있게 식사를 하려면 절대 늦지 말라고 서로 신신당부를 했다. 주연은 약속 시각보다 3분 늦었다. 나는 솔직히 그녀가 더 많이 늦을 거라 예상했는데, 예전부터 그녀는 약속했던 시간에 맞춰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3분 정도는 상당히 양호한 편이라고 난 생각했다.

 

 

 

 

 

내가 다녀가고 얼마 뒤에 할머니는 돌아가셨어.
몰랐어, 할머니가 돌아가신 줄.
응,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어. 그때는 그냥 알리고 싶지않았거든.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노년의 두 여성이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주연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나이가 든다는 건, 늙어간다는 건, 어떻게 보면 조금 무서운 것 같아.

나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럴지도, 라고 작게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항상 건강했는데, 말도 정말 잘하고, 욕은 또 얼마나 재밌게 잘했는데. 그런데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그렇게 초라하게 작아지고 바보처럼 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 그래서 화도 많이 났고.

 

 

 

 


이 바라보았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니 문득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먼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바뀐 듯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가 스무 살이었던 그때, 불어오는 눅진한 바람에 비 냄새가 가득했던 그 여름밤의 바닷가로.

주연아, 있잖아.

나는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마당의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가만히 주연을 불렀다.

응?

주연은 계속해서 내리는 비만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내가 너한테 고백했을 때,

응?

그제야 주연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바닷가에서 말이야. 만약 그때 니가 내 고백을 받아줬으면, 우린 어떻게 됐을까?

주연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리며 글쎄, 라고만 말했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파라솔의 바깥으로 조심스럽게 뻗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바닥으로...

 

 

 

 

 

그를 빨리 데리고 가라는 버스 기사의 전화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버스 차고지까지 갔고,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대는 그를 택시에 태워 그의 집까지 함께 가면서 이제는 그와 헤어져야겠다고 결심했다.

다음 날, 그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이제 헤어지자 말했다.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용서를 빌어도 모자를 마당에 그는 새삼 미련 없다는 듯 그러면 헤어지자고 했다. 당당하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그의 태도에 나는 화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5년여의 연애 끝에 헤어졌다. 나는 그에게 어떤 미련도 갖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헤어지지 못한 게 후회스러울 정도였고, 헤어지고 나서야 군대에 간 그를 2년이나 기다렸던 게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인 것이다. 결혼식에서 마주친다면 어색할 수야 있겠지만 그건 잠깐일 뿐, 내가 불편해 할 필요는 없고 그냥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결혼식에서 그를 만나는 게 더는 걱정되지 않았다.

그랬는데, 그렇게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선배의 결혼식 날짜가 다가올수록 생각과는 다르게 점점 태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 자신의 모습이 신경 쓰였다. 결혼식장에서 그와 마주할 나의 모습이 누구보다 매력적이고 멋진 모습이길 원했다. 태윤은 예전의 날씬하고 활기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배 나온 아저씨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육아에 지쳐 피곤함에 찌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앞에서 나는 여전히 싱그럽고 아름다운 모습이고 싶었다.

스스로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에게 지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물론 연애를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는게 인생에서 앞서 나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와 헤어진 뒤 지금까지 괜찮은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결혼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 완벽하게 멋진 날씨를 만끽하며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최대한 멀리 혼자서 걷고 싶었다. 그 후에 몸이 조금 지쳤을 때쯤 맥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차갑고, 그리고 맛있는 맥주를. 타코 같은 가벼운 음식과 함께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엔 정말 누구 보다 행복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바로 편한 운동화를 사자고 생각했다. 내 발에 맞는 편한 신발을 신고, 편한 걸음으로 지금부터라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의 시선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이토록 멋진 하루를 온전히 마음을 다해 즐겨보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알려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고 했다. 너무나 바보같이 엄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 어딘가에서 조금씩 퍼지고 있을 암세포를 애써 모른 척하며 그저 평소처럼 하루하루를 살았다. 어쩌면 엄마의 가슴 속 암은 집안이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에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그리고 회복된 일상을 어떻게든 계속 유지하기 위해 긴 시간 동안 남몰래 혼자서 품고 있었을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이 잉태시킨 건지도 몰랐다.

엄마의 투병 생활이 시작된 이후 우리 가족의 일상은 많이 달라졌다. 각자의 일정이며 생활패턴, 심지어 살림살이의 배치까지 모든 건 엄마에게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생소했고...

 

 

 


수영을 배우니까 제일 좋은 게 뭔지 알아요?

음, 아무래도 건강해지는 거?

수겸의 대답에 은정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것도 좋지. 그런데 그것보다 더 좋은 점이 뭐냐면, 물속에서 수영하는 중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는 거죠. 내 호흡과 팔다리의 움직임에만 온전히 집중해야 하니까요. 그러지 않으면 호흡이 흐트러지고 몸에 힘이 들어가서 금방 숨이 차거든요.

은정은 마치 수영을 하는 것처럼 숨을 짧게 들이쉰 뒤 천천히 길게 내쉬었고, 그녀의 작은 어깨는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난 그 순간이 좋아요. 세상과 분리되어 물속에서 이런저런 잡생각 없이 오로지 숨을 쉬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그래서 요새는 계속 그렇게 있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다른 생각이 안 들도록?

응.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날 힘들게 하는 생각들이...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 기분을 충분히 공감하지만 돌아갈 수 없는 이십 대를 그리워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며, 어쨌든 우리는 삼십대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니 그걸로 위안 삼자고 했다. 그러면서 젓가락으로 국물 속 조개를 건져 올려 내게 향하며 말했다.

정말 갓 잡아 올린 것 같은 신선한 서른 살!

그리고는 자신이 나보다 일주일 더 신선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조갯살을 발라 먹었다. 그 모습이 장난스러운 듯 귀엽게 보여 나도 모르게 웃었고, 그녀도 따라 웃었다.

9시가 조금 넘어 우리는 주점에서 나왔다. 솔직히 그녀가 마음에 들었고 함께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첫 만남이니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만남을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녀가 버스를 타는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가는 중에 예보에는 없던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내려앉은 눈송이는 아스팔트...

 

 

 

 

 


우리는 천천히 오랜 시간 동안 식사를 했다.

지금도 서른이 되었다는 게 슬퍼?

식사가 거의 마무리될 때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음, 연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라고 나는 잠시 생각한 뒤 천천히 답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가끔 그럴 때 있잖아, 무심코 본 약봉지에 적혀 있는 내 나이를 본다든가 했을 때, 그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가 서른이 되었다는 걸 종종 깨닫게 되는데, 그럴 때면 내 안에 있던 이십대의 내 모습 일부가 조용히 사그라지면서 텅 빈 공백이 점점 늘어가는 기분이 들어. 먼지만 쌓여가는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뭔가 안타깝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뭐 그런 기분이야.

그녀는 자신도 그 기분을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최근에 본 영화 얘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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