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에세이]
청춘일지, 정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청년들
JULI, 고석호, 김정하, 방하영, 방성훈, 이서진, 이영애, 이여름, 장인영, 전혜주, 한지희
강릉 옆 동네 정선 청년들이 쓴 책. 청년, 청춘, 열정이란 단어가 진부해진 시대.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하다 할 수 없는 청춘 같은 책이다. 푸른 산과 함께 자란 정선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아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제목 : 청춘일지
저자 : JULI, 고석호, 김정하, 방하영, 방성훈, 이서진, 이영애, 이여름, 장인영, 전혜주, 한지희
펴낸곳 : 숲자매숲생활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337쪽
크기 : 138x200mm
가격 : 15,000원
발행일 : 2021년 2월 14일
ISBN : 979-11-973406-0-4 (03090)
숲자매숲생활 인스타그램
https://instagram.com/forest_of_twins
청춘일지 프로젝트
2020년 청춘일지 출판 프로젝트는 정선, 산촌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생각, 경험, 이야기를 전하는 출판물 제작 프로젝트 입니다. 청춘일지는 숲자매와 청년들이 함께합니다. 그리고 지역과 사회, 어른의 응원과 지지로 성장합니다.
프롤로그
스무 살이 되던 해, 우리는 부푼 기대와 설렘을 안고 자연스럽게 지역을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맞이한다는 것은 굉장히 두렵기도 했지만 설레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슴 한켠에는 우리를 품어준 보금자리에 대한 아린 감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내가 다시 정선에 돌아올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함께 졸업하는 친구에게 물어보니,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이곳을 떠나 살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저는 정선에서, 지역에서, 고향에서 꿈을 꿀 수 없다는 것에 슬픔과 궁금증이 차올랐습니다.
산능선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그 속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로 꽉 차있는 곳인 정선. 생명의 기운들이 채워져 있는 정선에서 우리들은 꿈을 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정선'을 배경으로 한 어느 다큐멘터리에서는 '거대한 물줄기는 시간을 품어 강을 만들고 문화를 만들고 길을 만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선에서 자라난 우리들은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아리랑'을 배웠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에서도 정선은 강산과 어우러져 크고 작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이야기가 생겨나는 것을 자연스럽게 구전되며, 하나의 문화로남아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없나 봅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나고 자랐던 곳이 ‘소멸’에 이른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동네를 떠나기에 바빴습니다.
우리가 뛰어 놀던 곳, 우리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만들던 곳, 따뜻했던 많은 것이 그저 추억 속에 묻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다양한 지역(Local)에서 젊은 사람들의 다양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다시 지역에 돌아갔는지,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고, 만들어가고 있는지 궁금하실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정선에서 살았던, 그리고 살고 있는 청년들과 함께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해 보았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앞장서서 지역을 즐기고,알게 되고, 만들어간다면 지역의 미래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청춘일지: 정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은 정선 지역에서 살았던,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11명의 청춘 작가들 모여 ‘나로서의 삶(청년)'과 '지역에서의 삶(정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과연 정선에서 살고 있는 젊은 세대들...
깊은 밤 별처럼 빛나는 11명의 청춘작가
JULI : 저는 언어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 그리고 가치를 배우는 사람입니다. 낯을 가리지만 언제나 세계를 바라보고 그곳에 나아가 살아가고 싶습니다. 훗날 이 지구 어딘가에서 따스한 햇볕 아래 있고싶어요.
고석호 : 정선에 태어나 산골 계곡과 별빛 아래 뛰어놀던 추억들이 가득합니다. 밤하늘을 수놓았던 별빛의 경이와 산골 계곡에 생명의 약동(Elan Vital)이 선물한 호기심은, 대학에서 물리학 철학 생물학을 공부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KIST)에서 면역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정하 :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제 마음이 변치않고 사회를 푸르게 만드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함께하는 많은 사람들과 열정을 잃지않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방성훈 : 대학을 제주에서 졸업하고 현재는 정선에서 공중방역수의사로 근무 중입니다. 강원도는 올해 처음 처음 내려왔습니다. 정선군청 자유게시판에서 청춘일지 작가 공모를 보고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기타연주와 잡다한 자기계발에 관심이 많습니다.
목차
프롤로그 - 작가소개
1부 우리는 청춘
제1장 자라다
스페인 토마토 15
스무살≠어른 21
작은 씨앗이 싹트기까지 30
밝은 연꽃이 피어나는 곳 38
뿌리가 된 마을 41
아일랜드 친구의 위로 45
안.읽.씹 47
정선은 거센 파도와 같았다 50
정선은 튼튼한 울타리와 같았다 53
하늘색 풍선 62
제2장 배우다
햇살과 양분 71
눈 떠보니 서울 80
호기심 탐험기 86
정하다운 대학생활 92
같이 하실래요? 96
제3장 떠나다
사바이디, 라오스 103
Rast in deutschland 132
2부 우리의 정선
제1장 다시 고향
어른이 되려고 애쓰는 일 161
우연의 종착지 166
고향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170
소복이 내리는 눈 속에 내가 있었다 174
내일을 만들어갈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180
제2장 삶의 터전
감동을 주는 연탄 195
우리마을 이야기 203
어깨동무 우리집 207
고추화분 210
할멘저스 213
우리마을 최고어른 216
ㅊㅊ당 220
무주식 223
3부 우리의 상상
소설
사라진 고한을 찾아서 229
희곡
한의 노래 280
낭중일기 292
정선에서의 시 7편 329
길과 자유
태엽인형과 사람의 간격
동물의 집
유리알 구슬
강
산
있다는 것
기록함으로써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될 수 있으니까. '아,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었지'라는 것을 누구 한 명쯤은 알아준다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시로 나가야만 했다. 시골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없었다. 영화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나는 영화를 배우기 위해 열일곱 살에 정선을 떠나, 홀로 인천에 정착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린 결정이었기에, 내 꿈을 내 힘으로 이룰 수 있다는 걸 부모님께 보여주고 싶었다.
이모 집에 살면서 아르바이트로 영화 학원비를 벌었다. 가고 싶은 대학의 성적 커트라인이 높았기 때문에 학교 공부 역시 놓을 수가 없었다. 매일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했고, 공부하지 않을 때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매 순간을 꽉꽉 채우며 약 1년 반을 버티고 나서는 한계에 다다라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영화고 뭐고 다 내려놓고 공부에만 집중하고...
사실, '감히 나 따위가 영화를 만들고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겠냐'고 매일 좌절하곤 한다. 세상에는 멋진 감독들이 너무나 많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감독들이 내 눈엔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담고 싶은 사람일까? 이 세상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작품을 보고, 내 작품이 그 사람 인생에 조금이라도 유의미하게 스며들 수 있다면, 성공한 프로듀서 아닐까?
나는 무엇을 담고 싶은 사람일까. 찬찬히 생각해본다. 나는 그냥 '사람'이 좋다. 인생이라는 것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애쓰는 그들을 관찰하는 일이 흥미롭다. 결국에는 모두 다 죽는데, 죽기 전까지 열심히 살아보려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흥미롭다.
영화나 드라마도 판타지보다는 현실과 맞닿은 작품들을...
엄마가 추억한 시절은 마을의 탄광산업이 흥하던 때였다. 지금은 한 학급에 한 반뿐이지만 당시에는 학생들이 넘쳐나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고 시커먼 탄 때문에 부잣집 아이들만 흰옷을 입었다는 이야기 등. 그리고 지금은 폐광이 되어 사람들이 다 떠났고 마을에 작은 카지노가 들어섰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게 된 정선. 엄마로부터 같은 공간, 다른 시간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정선을 함께 공유했고, 나는 이 시골 마을에 조금씩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마을의 작은 카지노가 커지기 시작했고 얼마 후엔 스키장이 들어섰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놀이터밖에 몰랐던 아이들은 너도나도 스키장에 갔다. 덕분에 동생과 나도 겨울철 스키장에서 신나게 보드를 타곤 했다. 또 하루는 카지노에서 무상으로 수학여행을 지원해 주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생각을 가졌음에도 지금의 나는 지역에 살아감에 불안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특히, '지역에 남아있는 20대'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면, "사람들이 나를 '도태되고, 식견이 짧은, 소극적인, 수동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바라보지는 않을까?"라는 고정 관념이 가득찬 생각으로부터 나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면서 제한이 많아 답답할 때가 많았다. 학교에서 많은 활동을 하더라도 그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매체에서 보여주는 지역의 삶은 즐거움이 베어져 있었다. 어떻게 저런 즐거움을 담을 수 있는지 반신반의 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누군가는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이 지역으로 돌아오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삶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역에서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길, 젊은이로서 살 아가는 길은 보지 않은 많은 울타리를 넘는 일인 것 같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자연환경이 잘 가꿔진 곳에서 주체적인 삶, 다양한 삶을 가꾸고 있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지금 지역을 향하고 있다. 지역 역시 계속 변화...
나는 19년 내내 고향인 정선 토박이로 자란 촌사람이었다. 그래서 대전이라는 지역과 대학교 자체는 내게 있어 정말 새로운 세계였다. 늘 1시간이나 2시간 간격으로 있던 고향 버스와 달리, 이곳에선 버스가 6분 만에 다녔고, 같은 장소를 지나가는 것도 많았다. 그리고 중·고등학생 땐 자주 접할 수 없었던 영화관, 백화점, 큰 마트, 음식점, 지하상가 등이 참 멋지게 다가왔다.
다양한 학생들이 어울리는 곳이 대학교이기 때문에 사람에...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서울에서 어찌살까 고민하던 중, 강원도에서 서울로 진학한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강원학사'라 불리는 그곳은 서울에서도 관악산 언덕배기에 위치해 숲 내음이 가득한 곳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꽤 재미난 일들이 많았다. 로비로 들어서면 '강원도에 사람 없다는 말 듣지 않게 하라'는 글귀가 떡하니 쓰여져 있었고, 소위 강원도 사람을 비유하는 감자가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다는 감자 캐릭터, 포텐이가 있는 곳이 었다. 가장 재미난 사실은 매해 신입생들이 입소하는 날엔 같은 방 고참 언니들이 기숙사로 들어오는 버스번호와 지하철 타는 법을 가르쳐 준다는 사실이다.
대학교 1학년, 같이 서울로 올라온 친구와 첫 수업을 듣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학교에 가기 위해 2호선 반 바퀴를 도는 동안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도시의 마천루 위로 높게 솟은...
이야기를 마치고 들썩거리는 분위기를 피해 정전 옆 영녕 전에 들렀다. 영녕전은 얼마 전 교양 시간에 이야기를 들었기에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종묘가 흥미로운 점은 왕이 죽으면 후대의 왕과 신하들이 죽은 왕의 공덕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공덕이 높다고 판단되면 정전에, 그렇지 못하다 판단되면 영녕전에 모셨다고 한다. 사실 죽으면 다 똑같은데...
죽은 자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오로지 산 사람의 몫이다. 무덤이 산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당대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의 평가로 '정전이냐, 영녕전이냐'가 결정됐다면, 시간이 흘러 그 의미가 퇴색된 지금 우리가 정하는 '정전이냐,
지금은 딱히 어른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있는 그 나이 그대로 앞에 놓인 고민에 충실하되
자연히 체득하게 될 일들에 순간의 감정으로 절망하지 않으려 한다.
지금은 능력을 인정받으려 애쓰지 않는다.
맡은 바 최선을 다하되 판단은 상대의 몫
알아주면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된 사실은
아직은 미성숙해 보이는 사회인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청년의 모습을 존중하며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어른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반쪽 해님은 이곳 사북에서 나고 자랐다. 진달래를 따먹으며 고개를 넘었다는 화절령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 때부터 사북읍에 살았다. 그때 사북은 지금보다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한 학년에 5반씩 있었고, 오락실도 4개나 되고, 비디오 대여점과 전자제품 파는 가게도 있었다고 한다. 해님이 사북에서 살기 시작할 즈음 먼 데서부터 광산들이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해님이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사북으로 돌아왔을 때, 완전히 폐광 지역이 되어버린 사북은 더는 해님이 알던 사북이 아니었다고 한다.
기차가 사북역 플랫폼에 들어섰을 때 내리려던 해님의 발걸음이 멈칫했고, 완전히 낯선 느낌에 다시 기차에 몸을 실을 뻔 했다고 한다. 그 애잔함으로 스산한 폐광의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고, 그리운 마음에 해님이 살던 집을 수레에 실어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지금까지 고향을 품고 사는 해님을 따라 나도 이곳 사북에 살게 되었다.
1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소중한 것을 한 번쯤은 잃어버린다. 그것이 물건이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고향이 되었건 간에. 나의 경우에는 잃어버렸다고 하기에는 애매했다.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도 아니거니와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어느 틈엔가 놓쳐 버린 것도 아니다. 내 고향은 자연스레 잊혀졌고, 사라졌다. 강원도 가장 남쪽에서 그 옛날 엄청난 부를 누렸던 동네는 심장이나 다를 바 없었던 광산이 멈춤과 동시에 서서히 죽어갔다. 사람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섰다.
공항에 갈 때 불편하지 말라고 하신 배려였다. 또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그곳에 있을 것을 알기에 곱씹지 않은 탓도 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촌스러운 모습을 하고서 변하지 않는 느린 흐름으로 있을 것을 알아서. 오만한 생각이 었다.
"고한? 그 동네에는 뭐하러 가요?"
그러니 버스 터미널에서 탄 택시 기사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기 출신이거든요. 안 간지 너무 오래 돼서 이번에 가 보려고요."
"거긴 이제 사람이 안 살 텐데......."
기사는 영 미심쩍다는 말투였으나 곧 차를 부드럽게 몰았다.
나는 창문에 기대어 바깥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하늘과 닿을듯한 산봉우리와 언제나 파릇파릇한 나무들, 그리고 새파란 하늘까지 어느 것 하나 바뀐 것이 없었다. 수없이 많은 건물이 올라갔다 무너져도 자연만큼은 그대로였다. 택시는 매끈하게 뻗은 도로를 달렸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마주한 것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여기서부터는 도로가 무너져서 더 못 가요."
"아...... 그럼 여기서 세워주세요. 감사합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승용차는 요 앞 조그만 공터에서 차를 돌려 엔진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얼마간 움직이지 못했다. 오랜만에 찾은 고한은 많이, 아주 많이 바뀌어 있었다. 멀리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내던 강원랜드 입구 의 성 모형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 냈고, 그 앞에서 앞다투어 홍보를 하던 스키샵이며 식당 건물은 유리창이 죄 깨져 있었다. 겨우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돌이며 깨진 유리 조각이 밟혔다.
아무런 감탄사를 내뱉을 수 없었다. 언제 돌아오든 늘 같은 -촌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을 동네라고 생각했다. 내가 해외로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발령으로 타지로 이사...
"나는 말이야."
"응."
"꼭 잘 될 거야. 그래서 고한을 탈출해서 도시로 나가 살 거야"
“그으래.”
"고마워, 미애야. 덕분에 기운 났다."
나는 미애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였다. 미애는 방긋 미소를 지어 화답했다. 차가운 밤바람에 꽁꽁 언 코를 녹이려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재잘대며 수다를 떨고, 도어락을 열어 현관에 신발을 벗어둔 다음, 미애는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새 속옷과 잠옷으로 갈아입고 푹신 한 이불이 기다리는 침대로 뛰어들었다.
샤워로 몸을 데운 덕인지 쌓아 두었던 고민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한 방에 날려 준 미애 덕인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던 어제와는 달리 금세 노곤해졌다. 눈 꺼풀이 무겁고,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내일은 힘차게...
내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자 한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털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데려가 준 거야. 이제 잘 살라고."
"뭘?"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곳이잖아, 여기가."
"......."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가면서 떠나 놓고는, 미련은 왜 남긴담."
“너 무슨 말을 그렇게, "
"오래 살았던 곳 정 떼기가 쉽지는 않았지? 연고도 없는 곳에 혼자 지내니까 힘들었을 거고, 고향 생각에 밤마다 울었을거고."
".........."
"괜찮으니까, 이제 가. 그리고 잘 살아."
코가 시큰거리더니 이내 울음이 터졌다. 결국 한영의 앞에 무너져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는 한영의 말대로 고한에 미련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수없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마을에 되돌아온 것도 그 탓일 것이다. 한영은 나를 위로하는 대신 내가 가진 모든 눈물을 쏟을 때...
하늘과 함께 보이는 저 산
언젠가부터 저 산을 저주했습니다.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캄캄한 산
너는 나를 무너뜨렸어,
이제 만족하니, 하고
악을 쓰다 지쳐 잠든 날
저녁이 어스름해지니 배는 또 고파져
주섬거리며 밖을 나섰습니다.
마음은 미적미적 지저분한데
바람은 차갑고 신선합니다.
강다방 이야기공장
강원도 강릉시 용지로 162 (옥천동 305-1)
이야기를 팝니다
강릉의 이야기를 담은 작은 독립서점, 헌책방, 출판사, 편지, 기념품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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