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에세이
랑데부 - 광막한 우주에서 너와 내가 만나, 김선우
예술가의 작업 노트, 일기장을 들여다 본 것 같은 에세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이의 고민, 다짐, 꿈이 담겨있다. 이 책이 보통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위로와 작음 꿈이 되어주길.
제목 : 랑데부 - 이 광막한 우주에서 너와 내가 만나 :김선우 에세이
저자 : 김선우
펴낸곳 : 흐름출판
제본 형식 : 종이책 - 양장본
쪽수 : 218쪽
크기 : 145x200mm
가격 : 20,500원
발행일 : 2024년 2월 23일
ISBN : 978-89-6596-614-2 (03810)
작가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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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새'라는, 이미 오래전에 멸종되어 사라져버린 새를 그려온 지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시간 동안 '작가'라는 직함을 지켜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쁘고 슬프고, 때론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되돌아보는 지금, 저는 제 자신에게 "꿈을 지켜왔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일이 생업生業이 되는 건 위험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지개가 떠 있는 저 먼 언덕 너머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리는 것과 같달까요.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 작품이라는 건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사회적인 산물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공감과 위로를 얻고, 때로는 '이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라는 강력한 연대의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명'이라는 광막한 공백의 영역에 자신의 이름을 존재하게 만들었을 때 예술가는 비로소 유명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예술가가 번듯한 이름을 얻는 일의 의미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일, 그렇게 살아남는 일이 이름이 없는 채로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 왔던 저를,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저를 지탱해주는 신념입니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어느 부분에는 의도적으로 결핍을 남겨놓아야만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이 있습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되는, 아프지만 소중하면서도 따뜻한 추억. 그런 인내의 기억들은 결국 오래도록 우리 삶의 견고한 버팀목이자 위안이 되어줍니다. 을지로는 제게 그런 곳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만났던 오랜 동료작가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때 제가 첫 작업실이라며 데려갔던 그곳이 작업실로는 너무나도 형편없고 열악해서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자랑하는 제 표정이 세상 천진하고 행복해보여서 걱정의 말을 결국 어렵게 삼켰었다고. 저는 그 말이, 그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은 사람의 표정을 알아봐 주었던 거니까요.
그 시간을 되돌아보는 지금, 그 마음을 가꾸고 지켜온 그 시절의 제게 따뜻한 안부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오래도록 지켜보아 준 당신에게도.
그렇기에 제게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인간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는 일입니다.
그 무수한 연습의 나날들 속에서, 언젠가 어느 날엔가 예고도 없이 캔버스 위로 떠오른 사랑의 형상을 발견했던 기쁨은 오늘의 연습을 위한 용기가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더없이 연습이 필요한 일입니다.
매 순간. 매 숨처럼. 언제나.
그 소망을 잘 아는 만큼이나 그의 현실적인(금전적인) 상황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취직해 치열한 생업의 전선에서 분주한 삶을 살아내고 있다 는(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터였습니다.
20대 후반 즈음, 우리는 가끔 학창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는 동네의 작은 공원에서 밤늦게 만나 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우리가 잃어온 것과 잃어버릴 것들, 소망하는 것들에 대한 넋두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건, 현실이라는 파도 앞에서 소중한 꿈은 제쳐두고 '평범한 사람'이 되는 운명을 따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저 또한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는 재료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 불안감을 핑계삼아 그저 캔 맥주를 부딪치며 그래도 잘 될 거라며 서로에게 기약 없는 위로를 건넬 뿐이었습니다.
철없던 시절의 우리가 무작정 두려워했던 '보통의 삶'이란, 어쩌면 남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별함을 좇는 일이 아닌, 결국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보통'을 찾아가기 위한 단 하나의 특별한 여정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그 보통의 균형을 찾아가는 삶의 고단한 여정을 지속하는 데에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중요하지만, 결국 나의 보통 속에서 가장 반짝이는 무언가를 알아차려주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비로소 서로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 가오게 됩니다.
우리를 이 세상 속에서 함께 존재하게 하는 일,
서로에게 무해한,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란 그런 것일지 모릅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기가 넘쳐 보였습니다. 그림에서는 작업의 고단함보다는 작가가 느꼈을 창작의 즐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전시의 타이틀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서툰 행복'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다는 건 그 일이 더 이상 개인적인 취미의 영역에 머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정의하는 '직업'이란, 좋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생존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외부의 무수한 평가 속에서 납득 가능하고 타당한 책임을 담보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인정받는 것, 직업인으로서 예술가의 딜레마는 꽤나 복잡합니다.
그녀가 보냈던 몇 년간의 직업적 공백은 그에 대한 불안과 질문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요? 그녀에게 있어 그 유예의 시간은 자신만의 고유한 무언가를 찾는 일에 대한 고단한 여행이었을겁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그녀는 작업을 통해 행복을...
그 말을 뱉자마자 아차 싶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INFP였던 그 작가님의 공감과 위로의 따스한 이야기에 냉철한 INTJ인 제가 찬물을 끼얹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어색한 공기로 가득차서 숨이 막힐 것 같은 몇 분이 흘렀습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 마이크는 다른 분에게로 넘어갔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지하철 안에서 그때 미처 뱉지 못하고 삼킨 말을 오랫동안 떠올렸습니다.
꿈을 깨면 죽는다고 해서, 그 꿈이 꼭 대단한 것일 필요는 없겠지요. 단지, 우리 삶에서 지켜야 할,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단어만은 마음속에 품고 살아갔으면 합니다.
지키는 루틴-오전 다섯 시에 작업실에 출근하고, 집에서 준비해 온 점심 도시락을 먹고,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 작업하는 것-에 대해 듣는 분들은 놀라거나 그게 가능하냐는 반응을 보입니다. 심지어 어느 작가 분은 "그건 작가가 아니다"라는 뼈있는 농담까지 했습니다.
이따금 이런 생각을 가진 분들을 만나곤 합니다. 예술가는 되도록 불건전한(비범한) 생활을 해야만 속세와 거리를 둘 수 있고, 그런 '보통'에서 벗어난 생활을 통해 특별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순수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이죠. 하루키의 말을 빌려 보겠습니다.
"예술 행위란 어차피 처음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존재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표출되어 나올 수밖에 없고, 그것을 솜씨 좋게 처리해내는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바로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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