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관련 도서, 강릉 사람이 쓴 책
바우길 편지, 김영식
강릉에는 제주 올레와 같은 걷는 길 바우길이 있다. 강릉바우길을 걸으며 지역과 동네에 대해 쓴 지역과 유적에 대한 에세이. 우체국에서 일했던 분이 쓴 글이라 강릉 사람도 잘 모르는 알짜배기 지역과 동네 정보가 담겨있다.
제목 : 바우길 편지
저자 : 김영식
펴낸곳 : BG북갤러리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275쪽
크기 : 152x225mm
가격 : 15,000원
발행일 : 2020년 06월 12일
ISBN : 978-89-6495-170-5 [03980]
강다방 이야기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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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식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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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바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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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사람들의 '강릉 바우길' 답사기
바우길 편지
바우길을 걸으면 강릉이 보인다
바우길 전 구간(17개)을 차례차례 걸으면서
길 위에 스며있는 선조들의 흔적을 더듬어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낸 인문학 에세이
김영식
산타고 길 걷고 글 쓰는 게 취미다. 백두대간을 두 번 종주했고, 두 권의 책을 냈다. 8년 동안 아들과 함께한 백 두대간 종주기 <아들아! 밧줄을 잡아라> 1·2권과 강원우정청 사람들과 함께 한 강원도 백두대간 종주기 <대청 봉 편지>다. 2013년 4월 설악산 국립공원사무소, 동부지방산림청, 강원지방우정청, 속초우체국과 함께 설악산에 대청봉 우체통을 세워, 설악을 찾는 산악인이 손편지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하였다. 우체국에서 35년 근무했으며, 화천우체국장과 강릉우체국장을 지냈다.
바우길을 걸으면 강릉이 보인다.
도시인에게 강릉은 로망이다. '강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경포 해변과 대관령, 커피거리다. 사람들은 강릉에서 맛집과 호텔, 바다 풍경만 보고 돌아간다. 국내외 유명 도시를 다녀온 자에게 무엇을 보고 왔느냐고 물어보면 스마트 폰에 저장한 몇 장의 사진을 보여준다. 도시의 겉모습만 보고 온 것이다. 강릉 바우길을 걷기 전까지는 나도 그랬다.
2018년 7월 강릉과 인연을 맺고 틈틈이 경포호수와 남대천, 해송숲길을 걸었다. 걷다보니 문득 '강릉의 속살'이 보고 싶었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지만, 퇴근 후 밥 먹고 술 먹는 일이 고작이었다. 아쉬웠다. 강릉 바우길은 두 가지를 한 번에 해결해 주었다. 강릉 바우길은 강릉의 산과 숲, 호수와 바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요, 강릉이 낳은 인물과 유적지를 아우르는 전통과 역사의 길이다. 대관령 옛길부터 안반데기에 이르는 전체 17구간 230여 km에 이르는 자연친화적인 길이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과 더불어 한국의 3대 명품 길로 알려져 있다.
걸으면서 강릉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고 했고, “한 직장에 있으면서도 바쁘다는 이유로 데면데면했던 동료와도 가까워질 수 있었다”고 했다.
2019년 말 강릉 바우길 사무국장 이기호 선생을 만났다. 그는 소설가 이순원 선생과 함께 강릉 바우길을 개척한 산악인이다. 그는 “제주 올레길은 여행기와 답사기가 수두룩한데 강릉 바우길은 책이 부족하다. 답사기를 책으로 펴내어 바우길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함께했던 우체국 바우회 회원들의 격려도 큰 힘이 되었다.
책이 나오기까지 많은 분이 격려와 도움을 주셨다. 어떤 분은 댓글 분은 전화로, 어떤 분은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으로 마음을 데워주었다. 강릉우체국 바우회를 이끌었던 김성호, 조기완, 홍동호 주무관의 헌신은 잊을 수가 없다. 덕담과 너털웃음, 흔쾌한 자료제공으로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던 이기호 선생의 응원은 보약과 비타민이었다. 디자인과 편집에 이르기까지
숲길이 고요하다. 바람 한 점 없다. 곤줄박이가 졸참나무 구멍 사이로 쪽쪽 소리를 내며 들락거린다. 이경희가 “어머! 어머!”를 연발한다. 숲에 들면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 산길이나 숲길을 걸을 때 라디오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걷는 자가 있는데, 이건 자연이 주는 축복을 거절하는 것이다.
대관령 양떼목장이다. 대관령 축산 고등학교를 다녔던 고향 친구가 있었다. 소나 양을 키우며 산기슭에 묻혀 사는 게 꿈이었는데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따금씩 이곳에 오거나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친구 모습이 떠오른다.
연리지 그루터기다. 윤상규, 심복희 부부가 걸터앉아 신혼부부 포즈를 취했다. 부부도 자주 다녀야 저런 포즈가 나온다. 자작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자작나무는 아궁이 불쏘시개로 좋다.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자작나무다. 종이가 귀할 땐 자작나무 껍질에 글을 썼다고 한다.
남자들은 모였다 하면 군대 얘기다. 우리나라처럼 군대 얘기가 화제가 되는 곳이 또 있을까?
반정 주막이다. 아흔아홉 구비를 다리쉼을 하며 넘었을 보부상과 선질꾼, 선비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송강 정철, 단원 김홍도, 매월당 김시습, 허균과 허난설헌도 넘었던 길이다. 주변이 떠들썩하다. 술 취한 사내들이 소리 지르며 사진 촬영에 분주하다.
이수원은 2015년 7월 9일 <이투데이> '세상풍경'에서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면 나무는 보지 않고 숲만 보고 온다. 단지 그곳에 갔었다는 것과 머물다왔다는 것에만 의미를 둔다. 도시와 산과 들에 널려있는 유적들과 자연의 표정은 제대로 살피지 않고 돌아온다. 그리고 마치 거기에 갔었다는 것을 증명 하기 위해 사진만 열심히 찍고 돌아온다. 어떤 것도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 중에 만나는 세상 풍경과 유적답사 역시 그렇다. 나무를 모르면 숲을 보지 못하고, 역사를 모르면 유적을 볼 수 없고, 인문지리를 모르면 세상풍경을 읽을 수 없다. 여행은 세상의 숲을 보러 떠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숲을 이루는 나무를 보러 떠나는 길이다”라고 했다. 길 위에 서는 자는 한 번쯤 곱씹어 보아야 할 말이다.
긴 내리막이다. 산은 내려가다가 다친다. 방심하기 때문이다. 심원용과 짝 이 되었다. 그는 거북이 마라톤 총무다. 마라톤을 시작한 이유를 물었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 보면 허리가 아픕니다. 약을 써도 안 지고, 병원에 가도 그때뿐이었어요. 그런데 뛰고 나면 아픈 게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나는 아프지 않기 위해 뜀니다. 배달 마치고 경포 호수 길을 수시로 뛰고 있습니다.”
심원용에게 마라톤은 특효약이자 주치의다. 별명은 '타일맨', '땜빵맨', '코만보'· 우제국 입사 전 타일공으로 일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人死留名, 虎死留皮). 한 그루의 나무도 쓰임을 받으면 이름을 남긴다. 고사를 지낸 다음 나무를 베는데, 베기 전에 “어명이요!”를 세 번 외치고, 외칠 때마다 나무를 쳐다본다. 나무와의 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다. 기 싸움에서 지면 공사 할 때 사고가 난다는 불문율이 있다고 한다. 무슨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전통은 무시할 수 없다. 쭉쭉 뻗은 소나무는 한양으로 가고 배배 꼬인 소나무는 고향을 지킨다. 소나무만 그러랴. 속담 안에 조상들의 지혜 가 담겨있다.
어명정에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심복희가 배낭에서 삶은 옥수수를 꺼냈다. 친정인 홍천에서 가져온 “농약을 하나도 안 친 무공해 옥수수”라고 했다. 심 복희는 매번 특별식을 가져온다. 지난번에는 흑미 김밥, 이번에는 홍천 옥수 수다. 최신옥도 꽈배기를 가져왔다. 여자가 있어야 특별식을 얻어먹는다. 최규인과 윤상규가 옥수수를 들고 전망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멀리 경포에서 연곡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바라보며 참이슬 한 병을 비웠다. 윤상규는 “최규인은 소주를 한잔해야 힘이 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중에 탕수육과 양 장피를 드론 택배로 배달시켜 주겠다”고 했더니 허허대고 웃는다. 웃을 일이 아니다. 주문은 로봇이 받고 자장면은 드론이 배달하는 날이 머지않았다. 최규인은 고요하다. 묻기 전에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잘 걷는 비결을 물었더 니 “화천 이기자 부대(27사단) 출신이다. 걷는 데는 자신이 있다”고 했다.
진달래꽃이 피었다. 진달래꽃은 '참꽃'이다.
박석균이 말했다. “어릴 때는 먹을 게 없어서 동네 뒷산에 올라가 참꽃을 따 먹었다. 어른들은 술을 담그고, 꽃을 따서 전(煎)을 부쳐 먹기도 했고, 문 창호지를 바를 때 참꽃무늬를 넣어 멋을 부리기도 했다. 선조들은 가난했지만 멋과 여유가 있었다.” 멀리 사천진, 하평리, 갈골, 해살이마을이 아늑하고 평화롭다. 밭가는 농부가 한 점이다. 허균 생가 터 뒷산 교산(岐山)이 가깝다. 풍수에서는 교산을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 같다고 와룡(臥龍)이라고 한다. 오대산에서 발원된 산줄기가 점점이 이어져 내려와 생가 터 뒤를 돌아서 바다에 닿는다. 명당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명당은 기가 세서 아무나 못산다고 한다. 풍수학자 최창조는 “좋은 땅이란 없다. 학교 다닐 때 가까운 길보다 좋아하는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걸어 다니듯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떤 자리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추억이 떠오르는 터가 있다”고 했다. 사람마다 맞는 옷이 있듯이 자신한테 맞는 터가 있지 않을까?
배낭에서 먹을 것을 꺼냈다. 사과, 바나나, 곶감, 카스텔라. 조금만 꺼내도 풍성하다. 길에서 배우는 건 재물이든 음식이든 나누고 베풀다 보면, 넉넉해지고 도와주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이다. 작은 부자는 아끼고 모아서 될 수 있지만, 큰 부자는 사람이 가져다준다. 큰 부자가 되려면 많이 베풀어야 한다. 많이 뿌려야 많이 거둔다.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五瓶二魚)의 기적'도 나눔과 베품의 비유다.
새내기 김현은 호기심이 많다. '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호기심은 아이디어의 보고다. 나이가 들면 호기심이 없어지고 변화를 싫어한다.
길 위에 서면 모두가 평등하다. 허균이 <홍길동전>에서 꿈꾸었던 세상이 강릉 바우길에 있다.
신동균은 “욕심 버리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달형은 “많은 길을 걸어봤지만 이렇게 좋은 길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모래사장에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최제무는 다시마 볶음을, 김성호는 카스텔라를 꺼냈다. 곽종일은 내려온 커피를 돌아가며 나눠주었다. 나눔의 기적이 따로 있겠는가? 하얀 포발과 긴 해안선을 바라보며 먹는 간식은 꿀맛이다.
사근진(沙斤津)이다. 남녀 꼬마 두 명이 모래성을 쌓고 있다.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이다. 모래사장에서 동심(童心)을 보며 때 묻은 마음이 조금 씻어진다.
박이추는 1949년 일본 규슈에서 태어났다. 협동농장을 꿈꾸며 1970년 초 한국으로 건너와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젖소를 키우며 살았다.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커피 회사와 차 학원에 다니다가, 일본 커피연구소장 가라사와를 만났다. 1988년 서울 혜화동과 안암동 고려 대 앞에 '가배 보헤미안'을 열고 원두커피 보급에 나섰다. 2004년 강릉으로 내려와 사천에 본점을 차렸다. 현재 강릉시내 2곳과 서울 상암동 모 방송국 건물에 분점을 운영하고 있다.
보헤미안은 '방랑자'다.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유랑민족인 집시가 많이 살고 있다고 15세기 프랑스인들은 '보엠(Boheme)'이라 불렀는데 1848년 작가 사카레가 그의 작품에서 영어 '보헤미안'으로 바꿔 불러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박이추는 2017년 4월 <월간 샘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커피 본연의 맛에 가까운 게 원두커피잖아요. 커피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반갑지만 너무 기술적인 것에만 치중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장사에만 염두를 두고 배우려고 해요. 돈벌이를 염두에 두면 커피 본연의 의미를 변질시킬 수 있어 걱정스럽습니다. 커피는 함부로 가르쳐주면 거짓말이 되기 쉬워요. 기술만 가르쳐서는 커피에 담긴 삶의 철학이나 참된 휴식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기 어렵습니다."
언덕에서 노암동을 바라보며 홍동호가 말했다. “산 아래 마을에서 10년을 살았어요. 여기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다니고 이사했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네요.” 그는 어릴 때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병역면제를 받았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나는 신의 아들'이라고 했다. 노암동에 홍동호의 애틋했던 사춘기 시절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월화정(月花亭)이다. 월화정은 1930년 남대천 북쪽 철길 위에 2층 누각으로 건립하였으나, 1936년 병자년 대홍수와 1940년 동해북부선 철로 공사로 절거되었다. 1941년 성산면 명주성에 재건립하였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2004년 현재 자리로 옮겼다. 무월랑과 연화낭자의 애절하고 풋풋한 사연이 전해진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벼슬하던 무월랑이 명주성(강릉)으로 부임하여, 남대천을 돌아보던 중 잉어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연화낭자를 보고 모습에 홀딱 반했다.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져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얼마 후 무월랑은 경주로 가게되어 헤어지게 되었다. 무월랑과 오랫동안 소식이 끊기자, 연화낭자 집에서는 다른 청년과 혼담이 오가게 되었다. 속이 탄 연화낭자는 무월랑에게 편지를 써서 키우던 잉어에게 주고 경주로 가서 무월랑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잉어는 편지를 가지고 경주까지 갔으나, 무월랑을 만나기 전에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 다행히 잉어는 무월랑 어머니에게 팔렸다. 무월랑 어머니가 잉어의 배를 가르자, 뱃속에서 연화낭자 편지가 나왔다. 깜짝 놀란 무월랑은 편지를 들고 명주성으로 달려와서 연화낭자 부모를 찾아뵙고 혼인을 허락받았다. 무월랑과 연화낭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후일 명주군 왕이 되었다.
설화는 상상력의 보고(寶庫)다. 잉어를 '사랑의 전령사'로 등장시켰던 조장들의 유머와 상상력이 놀랍다. 카톡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청첩장을 보내는 세상이다. 김홍신은 《하루살이 설명서》에서 “편리한 건 디지털이지만 건 아날로그”라고 했다. 정성을 담아 꾹꾹 눌러 쓴 손편지는 감동과 울림을 준다. 세상이 변해도 디지털은 아날로그 감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월화교(月花橋)다. 노암동과 중앙시장을 이어 주는 다리다. 철길이 도보다리로 바뀌었다. 다리 중간에 투명 강화 유리 을 내려다볼 수 있고, 발밑에서 물고기가 움직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강릉우체국 최수정은 “우리 오빠가 설계한 다리”라고 자랑스러어했다.
멀리 대관령과 선자령을 잇는 풍차가 선명하다.
산 모양이 마치 엄마가 아기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고 '모산',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다고 '밥봉', 볏짚을 쌓아 놓은 것 같다고 '노적봉', 인재가 많이 난다고 '문필봉'으로 불린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산봉우리가 밥그릇으로 보였겠는가?
모산봉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조선 중종 3년(1508년)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대관령에서 강릉 시내를 내려다보니, 옥거리(현 옥천동)에 육조(六曹)가 앉아있는 형상이었다. 권문세족(權門世族)도 많아서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산마다 혈을 막고, 경포대를 방해정 뒤로 옮겼으며, 모산봉을 3자 3치(약 1m)가량 깎아내려 권문세족의 위세를 꺾고, 인재가 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2005년 강남동 주민과 학생, 군 장병 등 1,200여 명이 힘을 모아 15톤 트럭 10여 대 분량의 흙을 산꼭대기까지 올려 옛 높이(105m)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 방해정은 경포호수 북쪽에 있는 조선 후기의 누각이다. 철종 10년(1859) 통천군수 이봉구(李鳳九)가 선교장 부속 건물로 지어 만년(晩年)을 보냈고, 1940년 증손 이근우가 고쳐지었다. 1976년 6월 17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장현저수지다. 물빛이 찰랑찰랑 눈부시다. 낚시꾼이 앉아있다. 낚시꾼은 '손맛'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남자들은 도박이든 운동이는 어디에 한 번 빠지면, 사달이 나야 멈춘다. 사달이 나기 전에 멈출 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
범일을 모르고는 강릉과 단오제를 이해할 수 없다. 속명은 김품일,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다. 열다섯 살 때 출가하여, 스무 살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스물한 살 때(831년) 당나라에 유학 갔다가, 서른세 살 때(844년) 귀국하여 마흔 살 때(851년) 명주도독 요청으로 도굴산문을 열고, 일흔아홉 살에 입적했다.
신라 하대 150년은 20명의 왕이 교체되는 정치적 격변기였다. 귀족은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대토지를 소유했고, 절은 면세 특권을 누렸다. 귀족은 골품제로 권력을 독점했고, 절은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는 교종 세력이 주류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에 허리가 휘고, 귀족한테 빌린 돈을 못 갚으면 땅을 빼앗겼다. 기댈 곳은 절뿐인데, 교종은 경전 해석을 둘러싸고 이리저리 갈라 졌다. 백성들은 희망이 없었다. 이때 나타난 게 바로 선종이다. 선종은 경전 공부를 안 해도 깨우침에 이를 수 있다는 4구표방(四句標榜 :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으로 기존 불교계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범일은 강릉을 중심으로 한 호족인 명주군왕 강릉김씨의 후손이었다. 범일이 13년 간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무엇을 배웠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유학을 아무나 가는가? 그것도 1~2년이 아니라 13년씩이나?
'스펙'이었다. 화려한 스펙을 가진 그가 교종으로 들어갔더라면 대우받으며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고향으로 내려와 사굴산문을 열고 중앙 교종 세력과 대립각을 세운 걸 보면, 소신이 분명한 재야 반골 승려가 아니었을까?
강신주는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에서 “모든 사람이 주인공 으로서 자신의 삶을 사는 것, 그래서 들판에 가득 핀 다양한 꽃들처럼 자기 만의 향과 색깔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화엄의 세계다. 선종의 역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학파 선사들마다 강한 개성이 풍기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불교의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선종의 역사는 자기가 속한 학파를 극복하는 역사, 혹은 스승의 스타일을 부정하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단독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강릉문화원 박도식 교수도 논문 '나말여초 사굴산문과 명주호족'에서 "신라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은 범일을 국사로 삼으려고 중사(中使)를 경주로 오라고 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아마 명주지역에서 정신적인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던 범일을 불러들여 지역 세력을 회유하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범일은 영동지역을 지배하던 호족과 손잡았던 정치 승려가 아니었을까?
학동 오독떼기 전수관 일대는 범일이 태어나고 활동하다 묻힌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석천(잉태), 서낭당(출산), 학 바위(버린 곳), 굴산사(활동), 도탑(무덤)이 그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굴산사 당우(堂宇 : 절터 규모)는 300mm가 넘었고, 승려 수는 200명이 넘었으며, 찾아오는 신도가 많아서 쌀 씻은 물이 동해로 흘러들어갔다”고 했다. 굴산사지는 1956년 홍수 때 주춧돌 여섯 개 와 '문굴산사(門崛山寺)'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처는 한국인의 마음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다. 부처는 신라에도 있었고, 고려에도 있었고, 조선에도 있었다. 한국 역사에서 부처를 빼놓으면 얘깃거리가 없다. 부처는 민초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미륵이요 메시아였다.
나는 '몸빼바지'를 볼 때마다 오징어 다리를 몰래 뜯어 먹었다가 어머니한테 혼나던 기억이 문득문득 되살아나곤 한다.
하시동 풍호(風湖)마을이다. 단풍나무가 호수에 비치는 모습이 로었다는 아름다운 호수는 1970년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공사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호수에 묻으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는 먹고살기 위해서 이쩔 수 없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쉽기 그지없다. 강릉시는 남아있는 호수를 아름답게 단장하여 2009년 7월부터 매년 연꽃 축제를 열고 있다.
연꽃 길을 나와 안인으로 향했다. 이학재와 김성호가 나란히 걷는다. 이학재는 늦깎이로 들어온 김성호에게 집배를 가르쳤다. 그들은 10년 전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겼다. 김성호는 “독한 고객(?)을 설득하려다 번번이 실패했고, 자괴감이 들어 몇 번이나 그만두려고 사표를 썼다”고 했다. 이학재는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사람을 무시하고 억지를 부릴 때는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그만두고 싶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사주 명리학자 조용헌은 “빈부와 귀천은 생을 바꿔가면서 교대한다”고 했다. 힘이 있고, 잘 나갈 때 많이 베풀어야 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뒤따라오던 최제무도 참았던 얘기를 털어놓았다. “우편물이 적을 때는 천천히 배달하고 싶어도, 택배나 등기고객의 독촉 전화에 어쩔 수가 없다. 이륜차 사고 예방을 위해서 위에서는 서두르지 말라고 하지만, 우편물이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서두를 수밖에 없다.
8구간 산우에 바닷길
북한 잠수함과 진돗개 하나
1996년 9월 14일 새벽 5시 함경도 원산시 퇴조항은 무겁고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검은 옷을 입고 입술을 꽉 다문 사내들이 세 줄로 도열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정찰국 해상처 제22잠수함전대 소속 함장 정용구 중좌 등 26명이다. 그들은 정찰국장 김대식의 작전개시 명령에 따라
춘천만 아니라 강원도는 곳곳마다 명품 길 요소를 갖추고 있다. 앞 다투어 길만 만들 게 아니라 스토리를 정리해서 알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길은 하드웨어요, 스토리는 소프트웨어다.
바우길 10구간은 명주군왕릉~천주교 공원묘지~위촌리 송양초등학교에 이르는 11km 금강소나무 숲길이다. '심스테파노 길'이다. '스테파노'는 예수의 열두 제자를 도와 과부에게 음식을 나누어주고, 교회 재산을 관리하던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일곱 부제(副祭)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다인들이 성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던 최초의 순교자였다. 이 길은 천주교 병인박해(1866-1870) 때 강릉 '골아우에 숨어 살다가 체포되어 죽임을
연고가 있는 강릉으로 이사 왔다. 선교장은 부속건물과 별채까지 포함하면 300칸이 넘는다. 집 지을 당시 경포호 둘레는 12km였다. 그때는 집 앞까지 물이 차서 다리를 건너야 올 수 있었다. 집에 드나들 때 배를 타고 다리를 건너다닌다고 '선교장' 또는 '배다리집'이라 불렀다. 선교장은 직계가족을 위한 안채와 별당, 손님이 묵는 열화당(話堂)과 활래정(活來亭), 방해정(放海亭, 경포호수 국도변에 있음), 여자 하인이 거주하는 연지당, 소작인과 노비들이 거주하는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열화당(悅話堂)은 집 주인이 살던 건물이다. 마당보다 1.5m 높게 지었다. 열화당은 중국 진(晉)나라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열친척지정화(親戚之情話 : 친척들과 이야기를 즐겨 나눈다)에서 차용했다. 큰 대청과 온돌방 작은 대청으로 이루어져 주변경치를 보며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바우길을 걷는 중 우체국 파업 예고로 파란을 겪었다. 최고책임자가 안팎으로 어려움을 격었다. 그는 시간 날 때마다 우편물 배달현장을 돌며 현장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드론 택배를 시연하고 전기차도 배치하는 등 다가 올 시대를 내다보며 우체국 혁신에 노력하였으나, '너무 앞서 간다'는 비판을 받았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보다 반 발자국만 앞서가라. 아무리 좋은 정책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공염불에 그친다”고 하며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했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다. 공직자는 국민을 생각하며 사무사(思無邪)의 마음으로 헌신해야 한다.
주문진(注文津)이다. 주문진은 고구려 때는 지산현, 신라 때는 명주, 고려 때는 연곡면이었다. 조선 중기까지는 새말(新里)로 불리다가, 1757년(영조 33년) 신리면이 되었다. 1937년 4월 주문진면을 거쳐 1940년 읍으로 승격했고, 1995년 명주군에서 강릉시로 통합되었다. 주문진은 함경도 원산과 부산의 중간지점으로, 1917년부터 부산과 원산을 오가는 여객선과 화물선이 들어왔다고 한다. 언제쯤 주문진에서 원산 가는 여객선을 타 볼 수 있을까?
주문진수산시장이다. 시장 지붕에 고래 한 마리가 꼬리를 치켜들고 있다. 주문진에서 잡혔다가 자취를 감춘 귀신고래다. 고래가 돌아오기를 기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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