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시립도서관 책방에서 보내는 어른방학
당신의강릉 한 여름밤의 글쓰기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그리운 건 그대일까 그때일까 그때의 나일까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건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한 시기였다. 과제와 작업을 위한 녀석이 꼭 필요했다. 우리나라 브랜드는 너무 비쌌고, 영상과 그래픽 편집 프로그램이 돌아가야 해, 성능이 떨어지는 너무 저렴한 녀석도 안 됐다. 그래서 우리나라 회사는 아니지만, 외국 출신인 녀석을 택했다. 색상은 검은색, 화면은 넉넉한 14인치, 3kg 내외의 꽤 무거운 녀석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밤에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운영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우리 둘은 함께 학교에 가고, 과제를 하고, 때로는 영화를 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녀석이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조금이라도 오래 함께하고 싶어서 램을 추가하고 HDD가 아닌 SSD로 부품을 교환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녀석의 시간은 나보다 더 빠르게 흘렀다. 그리고 점점 더 느려졌다. 오류도 자주 발생했다. 녀석이 힘들어할 때, 무게가 1kg이 안 되는 새로운 친구가 등장했다. 더 좋은 성능이면서도 가벼운 무게 때문인지, 나는 1호를 놔두고 새 친구와 더 친하게 지냈다. 책상 위 한편에 놓였던 1호는 어느 순간, 책상 옆으로 밀려났고, 2호와 3호를 거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났다.
시간이 지나 방을 정리하다 녀석을 발견했다. 녀석을 보내줘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느꼈다. 작별 인사를 위해 녀석을 분해했다. 나사를 풀고 부품을 분리하고 자판을 뜯어내는데 녀석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혹시나 사용할 수 있는 부품이 있는지, 사진을 찍어 AI에게 물어봤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램은 너무 오래되어 요즘 규격과 물리적 호환이 불가하고, 와이파이와 CD/DVD 드라이브 역시 요즘에는 사용되지 않는 부품이라고 했다. 사진 속 유일하게 쓸모 있는 물건은 우연히 함께 찍힌 다이소 5천원짜리 드라이버 세트뿐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꽤나 비쌌던 녀석이 지금은 다이소 드라이버 세트보다 가치가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되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판에 쌓인 먼지를 보며, 녀석만큼 나도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녀석과 함께 아이유의 좋은 날 노래를 들으며 발표 자료를 만들고, 자기소개서를 적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상상하던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였을까.
그때의 나는 밤을 새워 과제를 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리워했던 건 그때가 아닌 그 시절의 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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