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립도서관 책방에서 보내는 어른방학
당신의강릉 한 여름밤의 글쓰기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배를 만든 이유
✈️ / 비행기
밤새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혼자 하는 첫 해외여행이라 긴장이 많이 됐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오로지 나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는 현실을 마주했다. 무서웠다. 밤새 몸을 뒤척이는 동안, 혼자라는 것이 실감 났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늦잠 잘 수 있는 집이 아니라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앞으로의 여행이 걱정됐다. 하지만 비행기 탑승 시간이 다가왔고, 공항으로 가야 했다. 인도 땅을 한 번 밟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 / 기차
입석으로 무제한 기차 여행 할 수 있는 내일로 티켓을 끊었다. 서서 갈까 걱정했지만, 인터넷 사이트에서 알려준 발권이 가장 늦게 되는 자리에 앉았다. 기차를 타기 위해 영등포역에 갔다. 어렸을 적 시골 할머니 집에 가기 위해 들렀던 영등포역은 크고 대단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나이도 키도 많이 자란 지금, 역이 그때처럼 거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창문 밖으로 푸른 논과 밭, 산을 봤다. 마음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거대한 생명력을 느꼈다. 우리나라는 참 푸르구나. 보성 녹차밭 한가운데에는 무덤이 있었다. 경주도 그렇고 보성도 그렇고 이곳에 있는 무덤은 더 이상 무섭거나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자연과 삶이 함께하고 있었다. 내가 죽은 뒤에 녹차밭이나 경주 유적지 근처에 묻힌다면 외롭지 않을 것 같다.
🚌 / 버스
집을 나와 공항 가는 버스에 탔다. 일 년 동안 가족들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울렁였다. 1년이란 미지의 시간이 두렵고 무서웠다. 버스 안 라디오에서 어렸을 적 엄마 아빠에게 꼭 커서 효도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제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연이 나왔다. 버스 밖으로 가을 풍경이 보였다. 길가에 떨어지는 노란 은행나무잎이, 푸른 하늘과 몽실몽실한 구름이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줄 몰랐다. 이런 풍경을 앞에 두고 정작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1년 뒤 나는 다시 이곳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공항에 도착해 탑승 수속을 마쳤다. 비행기에 앉아 창문 밖을 보는데 왠지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나왔다. 그동안 쌓아두고 참았던 것들이 한순간에 터졌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야경, 하늘에서 본 지구는 마치 우주 성단을 보는 것 같았다.
🛳️ / 배
출항을 시작하자 선내 방송에서 노래가 나왔다. "말해다오... 연안부두 떠나는 배야..." 공항과 비행기가 세련되고 화려한 느낌이라면, 항구와 배는 뭐랄까 노래 연안부두처럼 애잔하고 짠한 느낌이 더 강했다. 배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갑판에서 바라본 겨울 밤바다는 추웠다. 찜질방처럼 개인 침대가 없는 3등석이라 그런지, 여행객보다 화물을 운송하는 아저씨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몇몇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안주 몇 가지와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지만... 오늘 일이 많아 하루 종일 김밥 2줄밖에 먹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저 아저씨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동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애환이 섞인 배 안의 분위기가 좋아졌다.
🏠 / 집
낯설었던 순간을 떠올리기 위해 오래전 썼던 일기장을 펼쳐보았다. 당시 느꼈던 설렘과 두려움, 걱정이 떠올랐다. 낯섦이란 단어는 설렘과 두려움, 걱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일은, 익숙한 것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발견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를 만든 이유는 아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어딘가 낯선 곳에 다녀와야겠다. 익숙한 것들이 다시 낯설게 보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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