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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다방 야매소설 012] 나는 내가 좋다

강다방 2026. 4. 9. 11:33

 

 

사진: UnsplashJulia Kicova

 

 

강다방 야매소설 012
나는 내가 좋다
지은이 강거북

 

 

나는 내가 좋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서른 후반이 되었는데 아직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다. 아직 난 불안정하기만 하다.

"민지는뭐든할수있지'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예전 취업 준비할 때부터 등록해 사용 중인 별명인데, 지금 들으니 좀 창피하다. 바꿔야겠다. 어렸을 때는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였는데, 당시에는 정작 그걸 알지 못한 게 아쉽다. 지나고 나면 지금 이 순간도 아쉽게 느껴질까? 강릉으로 여행 왔다. 일상이 아닌 타지라 그런지,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 감정이 떠오른다. 카페에 앉아 적어본다. 커피를 마시며 책도 읽고 있다. 잠시 휴대폰을 확인하다 아까 결제한 카드 알람이 보였다.

 


[케이은행] 입출금내역 알림
북카페 강다방 5,000원
생활비 통장 잔액 251,212원



아 여행하는 동안 돈을 너무 많이 썼다. 남은 한 달 동안 이 돈 가지고 어떻게 버티지? 가는 곳마다 맘에 드는 물건이 많아 눈이 뒤집힌 듯 질러버렸다. 생활비 통장의 바닥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한 달, 다음 월급날까지 이 돈으로 버틸 수 있을까? 강릉의 바다에 취해 너무 대책 없이 긁어댔나 보다. 이제 돌아가면 다시 개 같이 일해야 한다. 하 너무 무리했나... 아니다. 이렇게 여행하고 사고 싶은 거 사기 위해 일하는 거지 뭐. 빨리 월급날이 왔음 좋겠다. 근데 여기 커피 맛있다. 책도 많고 분위기도 좋다. 나만 알고 싶은 곳이다.

어떤 아저씨가 들어왔다. 체크무늬 셔츠는 오래 입은 티가 났고 소매 끝이 닳아 있었다. 괜히 경계한다. 다행히 먼 곳에 앉았다. 아저씨는 이어폰을 끼지 않은 채 휴대폰으로 드라마를 봤다. 모처럼 감성에 취했는데... 휴대폰에서 나오는 대사가 귀에 거슬린다. 아저씨를 째려본다. 가서 한마디하려다 그냥 참는다. 사람들은 왜 나이 들면 무례해지는 걸까? 나이 들면 현명해진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도 좀 더 나이 들면 남들 신경 안 쓰고 나만 아는 사람이 되려나? 조금만 더 있다 나가야겠다. 아줌마 한 명이 들어왔다. 포스가 느껴진다. 아줌마는 자리에 앉고 통화를 시작했다. 우렁찬 목소리가 범상치 않다.

"어, 강릉이다."
"뭐가? 아 내가 몇번을 말하노?"


아줌마의 기세에 눌렸는지 아저씨가 드라마 소리를 줄였다. 아니 아줌마 목소리가 더 커서 상대적으로 작은 느낌이다. 역시 태양은 하나, 세상에 두 임금은 없다. 잠시 뒤, 아저씨가 음량을 더 크게 키웠다. 하지만 아줌마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공간은 내가 지배한다는 듯 우렁찬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갔다. 잠시 뒤, 아줌마의 통화를 끝났다. 곧이어 아저씨 휴대폰에서 나오던 소리도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카페 매장 음악만이 흘렀다. 다시 책을 펼치는 순간 카카오톡 알림 메시지가 떴다.

"카톡"
[우리병원 단체 카카오톡방]
주말 관악산 단합 대회 안내

자세한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알람을 지워버렸다. 하 출근하기 싫다. 계속 여행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아줌마가 나를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던 아저씨는 그런 아줌마를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아줌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야야?"
"네?"
"니 학생이가?"
"아닌데요."
"아 학생 아이가? 난 대학생인 줄 알았지."


아줌마의 칭찬에 잠시 헤헤 웃을 뻔했다. 하지만 나 박민지는 이런 사탕발림 같은 말에 넘어가지 않는다. 도도하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아줌마를 무시하고 다시 책을 펼쳤다. 그런데 잠시 뒤, 아줌마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내 어릴 때 고생을 많이 해가지고 안 해본 게 없다."
"네?"
"근데 지금은 해운대에 집도 있고 건물도 몇 개 있다. 부자다."
"아 네..."

어쩌라는 것인지... 그렇게 부자면 디저트라도 하나 사주면 좋으련만, 아줌마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갑이 아닌 말부자였다. 아줌마를 무시하고 다시 책을 펼쳤다. 하지만 아줌마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어린이집을 하다가, 근데 들이 싫어지갔고 때리치았다 고마. 그래 몇 년 놀다가 내가 좋아하는 빵이나 실컷 물라고 빵집을 했다이가. 근데 진상들이 많아갔고 한 2년 하다가 다시 때리치았다."

 

옆에 있는 아저씨는 드라마보다 아줌마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지, 드라마를 끄고 아줌마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갑자기 뭐 지금까지 뭐를 오래 해본 적이 없는 기라. 그래갔고 이번에는 뭐든 진득하게 해봐야 싶어갔고 파리로 가가 거서 제일로 유명한 샹들리에 거리에 있는 학원을 등록했다 아이가.


옆에 있던 아저씨가 웃음을 터뜨리고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뱉었다.

"풋, 샹들리에가 아니라 샹들리제겠지."

아줌마는 미동 하나 없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시 한국 와갔고 빵집을 열었지. 처음에는 내 묵든다고 생각하고 좋은거 이빠이 때려 넣고 만들었지. 근데 사람들은 말이제, 신경도 안쓰드라. 그래갔고 적당한 재료 넣고 사진만 찍으면 잘 나오게 만들었지. 그러니 대박이 났다 아이가?"

아줌마는 음료 한 모금을 쭉 마셨다. 그리고 갑자기 시계를 봤다. 

 

"어머머 나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사장님 빵집 이름이 뭐예요? 나중에 근처 가게 되면 들려볼께요."
"에텡셀 쉬르 로."

짐을 싸는 아줌마의 손에 있는 굳은살과 주름이 보였다. 아줌마가 나간 뒤 옆에 있던 아저씨가 혼잣말했다.

"거참 말 더럽게 많네..."

카카오 지도를 켜 '에텡셀 쉬르 로'를 검색해 봤다.

'비싸기만 하고 맛은 없는 곳. 재료 좀 그만 아끼세요."
'프랑스 샹들리에 제과제빵 학원 출신이라는데 구라인 듯."
"여기 에그타르트 냉동 생지써요 ㅠ.ㅠ"
'왜 유명한지 모르겠음. 줄 서 있는 사람들 보면 세상이 단체로 나를 속이고 있나 싶음.'

아줌마의 당당한 모습과 상반되는 후기에 웃음이 나왔다. 리뷰는 비판 일색이었지만, 실시간 인스타그램 태그는 수천 개가 넘었다. 맛이 없어도 사람들은 그곳에 줄을 서는 자신을 전시하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가짜가 충분히 거대해지면, 세상은 그걸 진짜라 부른다.

다시 책을 읽으려고 책을 펼쳤다. 잠시 창문 밖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했다. 1층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한 향수향이 느껴졌다.

"어머, 세상에! 박민지? 야, 너 진짜 오랜만이다! 나 못 알아보는 줄 알았잖아. 근데 너 고등학교 때랑 얼굴 하나도 안 변했네."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박민지 맞지?"
"누구세요?"
"나야, 김민지. 우리 고등학교 때 이름 같아서 헷갈렸잖아. 기억 안 나?"
"아..."

생각났다. 이름이 같아서 선생님도 친구들도 헷갈려했던 김민지. 근데 김민지는 나보다 예쁘고 집도 잘 살아서 괜히 주눅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잘 지냈어?"..
"응."
"오랜만이다."
"너 지금도 용인 살아?"
"응. 너는?"
"난 강남으로 이사 갔어."

친구는 남자 친구의 팔장 대신, 한쪽 손에 들린 명품백 부두아를 내 눈앞으로 가볍게 흔들며 인사했다. 로고가 선명한 백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아, 오해하지 마. 여긴 내 예비 신랑. 우리 오빠가 가을에 결혼하자고 하도 졸라서, 강릉까지 와서 프러포즈 받았잖아. 아유, 난 천천히 하고 싶었는데... 아 이건 너무 TMI였나?"

옆에 훤칠하고 잘생긴 남자가 나에게 인사했다. 내가 아닌 민지의 얼굴이 좀 변한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성공했네... 

"아... 안녕하세요."

"넌 남자 친구 있어? 에휴, 우리 나이도 있는데 빨리 결혼해야지. 여자는 나이가 깡패라잖아. 아, 미안... 내가 너무 눈치 없었나? 근데 여기는 어쩐 일? 혼자 온 거야? 그래도 잘 살고 있나보네. 평일에 혼자 여행도 오고."
"어... 그냥 쉬러 왔어. 책도 좀 읽고..."
"아 그래? 책을 좋아하나 봐? 암튼 반가워. 너 인스타그램 해? 자 여기 내 아이디. 팔로우 해. 자, 그럼 우린 스위트룸 체크인 시간이 다 돼서 먼저 가볼게. 자기야, 가자."

친구가 나간 뒤, 잠시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봤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젠장. 책을 거꾸로 펼쳐놓고 있었다. 휴대폰을 열어 친구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검색해 봤다. 

 


블링민지
blingminji1004
팔로워 3.1만 팔로잉 3

 


가장 최근 게시물을 눌러본다. 강릉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OOO님 외 여러 명이 좋아합니다.
blingminji1004 강릉 왜케 예뻐?
좋아요 162, 댓글 26

'언니가 더 예뻐요!'
'언니 입은 옷 정보 부탁해용 ♥'
'와 존예'

 


강릉 바다를 배경으로 한 사진 속 김민지는 현실의 그녀보다 훨씬 투명하고 비현실적인 핑크빛이었다. 필터로 지워버린 건지, 사진 속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내 프로필을 열어봤다. 팔로워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 셀카를 찍어본다. 그닥 맘에 들지 않는다. 

 

카페에 나와 소나무 길을 걸었다. 짙은 소나무 향과 파도 소리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줬다.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아까 카페에서 이어폰 안 쓰고 드라마를 보던 아저씨가 뒤에서 나타났다. 버스가 도착해 탑승해 카드를 찍었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급하게 지갑을 펼쳐봤지만 만 원짜리만 있었다. 버스에 내리려는 순간, 아까 그 아저씨가 버스에 올라타더니 버스 기사에게 말했다.

"2명이요. 타세요."

아저씨는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단말기에 카드를 찍었다.

"감사합니다. 계좌번호 알려주시면 바로 이체해 드릴게요."
"됐어요. 괜찮아요."

아저씨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창가에 앉아 풍경을 바라봤다. 아저씨가 하차하려고 일어서서 재차 감사하다는 말을 건넸다. 창밖으로 어두컴컴한 하늘이 보였다. 아저씨는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미리 점찍어둔 맛집으로 향했다. 가게 앞 긴 줄이 보였다. 

'음...'

잠시 후, 줄을 서지 않고 방향을 틀었다. 근처 보이는 다른 곳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모험이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쪽이 나에게는 더 맞는 것 같았다.

 

초당순두부를 시켰다. 순두부를 삼키는 순간 따뜻함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담백하면서 몽글몽글 두부가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자극없는 슴슴한 맛인데 그게 좋았다. 계산을 하고 나가는데 오늘 하루 만났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카페에서 봤던 아줌마, 고등학교 친구, 버스에서 대신 카드를 찍어준 아저씨까지...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 가방에 걸려있는 거북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느리게 걸었다. 지도가 알려준 길이 아닌 길로 향했다. 바람이 불었다. 꽃향기가 났다. 라일락이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나는 이런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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