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Unsplash의Ant Rozetsky
강다방 야매소설 010
유진의 세계
지은이 강바다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할 유진님께 이 글을 드립니다.
2025년 8월 15일 강릉
20대의 끝자락에서 나는 나를 돌본다. 20대 초반에는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직장 생활 5년 차를 지나며 반짝였던 모습은 사라지고 일상에 찌든 평범한 직장인이 된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찌 보면 현명해지고 노련해진 것일지도. 뭔가를 잃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 맞는 동료와 강릉으로 여행을 떠났다. 평창을 지나 영동고속도로를 달리기를 몇십 분, 귀가 먹먹해졌다. 대관령이란 표지판을 지나자, 멀리 푸른 바다가 보였다. 창문을 내리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소나무 향과 멀리서 불어오는 바닷바람 냄새가 느껴졌다.
직업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싶다. 아니,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그런데 그렇다고 마땅히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 걸까? 지금처럼 생활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해야 한다. 암튼 그렇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여행이 끝난 뒤에는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이 조금은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일상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 있어서인지 평소와는 다른 생각이 든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책 너머로 바다가 보인다. 바다 근처에 사는 강릉 사람들은 바다를 자주 보러 갈까? 부러워졌다. 내륙에 살아서인지 바다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문뜩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바다는 전 세계가 이어져 있으니 쭉 따라가면 미국이 나오고, 더 가면 대서양이 나오고, 계속 가다 보면 유럽이 나올 것이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희망봉을 거치면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를 거쳐 결국엔 우리나라로 돌아오겠지? 눈앞에 보이진 않지만 연결된 세상을 상상하니 어렸을 적 바다를 보며 되고 싶었던 내가 생각난다.
사람들이 바다를 좋아하는 건, 모든 생명체의 고향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순간 팀장님으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내일 출근 잘하라는 연락이다. 그동안 못 봐서 보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하.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출근하고 나면 해야 할 일이 한가득이다. 당장 처리 기한이 다가온 민원과 정보공개청구가 떠올랐다.
눈을 감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셔 본다. 어디선가 첫 출근 후 퇴근할 때 들었던 재즈 음악이 들린다. 어렸을 때 먹었던 달콤한 딸기가 떠오른다. 가족과 함께 강릉에 와서 물놀이 후 먹었던 치킨 냄새가 난다. 어쩜 나는 이미 누군가 꿈꾸던 미래가 아닐까? 문득, 오래전의 내가 떠오른다. 파도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계속 밀려왔다.
2020년 10월 15일 영월
첫 출근 날이었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전날 밤잠을 설쳐서인지, 아님 하루종일 긴장한 탓인지 일기를 쓰는 지금 순간이 몽롱하다. 출근 전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무난한 정장 치마에 하얀 셔츠를 입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조금 일찍 회사에 도착해 출근하는 사람마다 인사했다. 사무실 한편에 있는 설마 저 자리가 내 자리일까 했던 곳이 내 자리로 당첨되어 헛웃음이 나왔다.
임용식이 열리는 강당으로 이동해 임용장을 받았다. 코로나가 유행 중인데도 군수님과 악수도 했다. 임용식이 끝난 후,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앞으로 사용할 아이디를 만들고 이런저런 정보를 입력했다. 전임자가 남겨놓은 인수인계 파일을 열어봤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됐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사수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다들 바빠 보였다. 용기 내어 모르는 걸 물어봤는데, 사수가 “그런 건 알아서 찾아보세요”라는 말을 했다. 속으로 울었다. 힝... 찾아보고도 모르니까 물어봤지. 공무원은 인수인계가 없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심하다. 그래도 옆에 있는 주사님은 좋아 보여서 안심이 된다. 앞으로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첫 출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라디오에서 「He's A Tramp」 노래가 나왔다. 잔잔한 음악이 고단하고 긴장했던 하루를 위로해 줬다. 창밖으로 붉고 노랗게 물든 산이 보였다. 참 예뻤다. 생각보다 출퇴근 시간이 오래 걸려 회사 근처로 집을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이 월급으로 월세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는데 걱정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목표, 대학에 가서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게 목표였는데 막상 목표했던 것을 이루고 나니 기쁘기도 하지만 허무하기도 하다.
나중에 이 일기를 읽을 미래의 나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 유진아 그때는 업무가 좀 익숙해졌니? 까칠한 사수는 계속 까칠하니? 새로운 집 안 구하고 출퇴근은 계속 제천으로 하고 있니? 누가 뭐래도 네가 최고니, 이상한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말고 너를 잘 지키며 살자. 언제나 난 널 응원한다. 화이팅 노유진!
2015년 2월 15일 제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 학교생활이 끝났다. 사물함에 있는 짐을 정리하고 남은 물건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 데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학교 근처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친구 현숙이는 이제 서로 헤어진다는 사실에 떡볶이를 먹다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놓고 다음 날 또 만나 웃겼다. 친구들과 술집도 가봤다. 쓰기만 한 술을 왜 먹는지 모르겠다. 아직 진짜 어른이 아니라서 술맛은 모르는 건가? 기대했던 수학여행은 결국 가지 못했다. 그래서 좀 아쉽다.
가장 가고 싶은 학교는 떨어졌지만, 그래도 마음에 두었던 학교에 붙어 다행이다. 이제 학생이라는 이유로 못 했던 것들 하나하나 다 해볼 거다. 지금보다 더 예뻐질 내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제천대 여신 노유진! 아자아자! 대학 가면 남자 친구도 생길까? 괜히 입꼬리가 올라간다. 건축학과는 과제하고 난 다음 크리틱이란 걸 하는데, 학생이 만든 모형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는 교수도 있다고 해서 무섭다. 그래도 난 공간감이 좋으니 잘할 거라 믿는다. 좋아 제천대 여신에 과탑까지 추가하자. 이렇게 쓰고 나니 손발이 좀 오그라든다. 그래도 뭐 어때 나 말고 이 글을 읽을 사람은 없을 텐데.
특별한 날에만 일기를 적는데 오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득 채워본다. 앞으로 대학 생활 하며 즐겁고 행복한 내용으로 일기장을 가득 채워야지. 아 오늘은 도서관에 가서 만화책 하이큐도 봤다. 친구 현숙이가 추천해 준 책인데 생각보다 재미있다. 책 보느라 저녁 먹는 것도 까먹었다. 아직 인생 책이 없는데 이 책이 인생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진짜 배구 경기도 보러 가봐야겠다.
2010년 2월 15일 제천
중학교 들어가는 기념으로 엄마가 스마트폰을 사줬다. 화면을 터치하면 작동되는 휴대폰이 신기하다. 엄마 몰래 앵그리버드 게임도 깔았다. 동생은 나만 스마트폰 사줬다고 삐졌다. 치! 자기가 삐지면 어쩔 건데? 중학교 들어가면 어련히 사주겠지. 요즘 애들은 모자람 없이 자라서 큰 일이다. 나 어렸을 때는 휴대폰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거였는데. 쯧쯧... 세상 참 편해졌다. 스마트폰 사주는 대신 공부 열심히 하기로 엄마와 약속했는데, 막상 책상에 앉으니, 공부가 하기 싫다.
어제는 가족끼리 기차 타고 강릉으로 여행 다녀왔다. 4시간 가까이 기차를 탔는데 창밖으로 시시각각 풍경이 변해 지루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김밥과 삶은 달걀, 사이다도 챙겨 기차 안에서 먹었다. 강릉에 도착해 또 밥을 먹고 경포 해수욕장에 가서 물놀이도 했다. 바다를 보니 과학 시간에 배웠던 지구상 첫 생명체가 바다에서 나왔다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바다를 좋아하는 건 바다에서 나와서일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보며 아빠가 말했다. 우리 몸에는 매일 수억 개의 세포가 죽고 새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때로 스스로 멈춰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사실은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는 거라고 말씀하셨다. 아빠의 말이 알 듯 말 듯하다. 물놀이 이후 비비큐 치킨도 시켜 먹었다. 하루 종일 먹었는데 계속 들어간다. 오죽헌도 방문했다.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도 구경했다. 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 행복한 하루였다.
2005년 5월 15일 제천
중간고사 시험이 끝났다. 시험은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올해부터 주5일제 수업이 시작됐다. 2주에 한 번 토요일에 수업을 안 한다. 그래서 이번 주 토요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 책 읽으려고 했는데 늦잠을 자버렸다. 평소 같으면 학교에 있었을 텐데 침대 이불 속에서 햇살을 받으며 일어나니 기분이 좋았다. 엄마가 딸기를 사와 만화책을 보며 먹었다. 딸기가 달콤했다. 딸기는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내일은 친구들과 롯데리아에 가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성민이도 온다고 했다. 무슨 옷을 입고 갈지 벌써 고민된다.
도서관에도 다녀왔다. 도서관에 가면 왠지 똑똑해지는 기분이 든다. 다양한 주제의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선생님도 되고 싶고, 과학자도 되고 싶고, 건축가도 되고 싶다. 다 멋있어 보인다. 나중에 어른이 된 멋진 내 모습을 상상해 봤다. 난 어떤 어른이 될까? 미래의 유진아 안녕?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니? 주변에 널 괴롭히는 못된 놈들이 있다면 똑똑하고 예쁜 네가 참으렴. 시험은 끝났지만, 중학교 준비 등 해야 할 게 참 많다. 현생 살기 넘 바쁘다. 초딩에게 세상이란 참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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