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다방 야매소설 009
흑과 백
지은이 강스터
덱스터를 알게 해준 건님께
드라마를 보며 덱스터를 응원했듯 건님도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나는 계속 망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계속 버티고 있었다.
“마이애미, 여기는 모건. 응답하라.”
“찌지직-.”
“마이애미, 여기는 모건.”
“찌지직-.”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작은 우주 먼지와 기계 파편으로 우주복이 조금씩 부서졌다. 어깨 부위 테플론 코팅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계기판의 압력 수치가 경고음을 냈다.
“삐삐삐-.”
“젠장...”
절망 앞에서 유난히 푸르게 빛나는 지구가 눈에 들어왔다.
‘더럽게 아름답네...’
그동안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정신이 조금씩 흐려졌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짧은 인생을 살다 가는구나...
그렇게 나는 기억을 잃었다.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무언가 움직임이 느껴졌다. 눈을 떴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죽은 건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조금씩 눈이 적응되는 찰나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누군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쉿!”
“여긴 어디죠? 저 죽은 건가요?”
“어둠 세상. 어. 너 거의 죽을뻔했어. 그리고 자꾸 소리 내면 어둠의 도살자가 나타나니 입 좀 다물어.”
“어둠의 도살자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 테니 조용히 해.”
상대의 손에 의지해 어둠 속을 걸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걸으려니 신경이 곤두섰다. 기괴한 벌레 울음소리와 간헐적인 나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푹 꺼진 땅을 밟아 휘청일 때마다 심장이 철렁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저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마을이었다.
“다 왔어.”
“여기가 어디죠?”
“마을.”
“아까 어둠의 도살자는 뭐예요?”
“사람들을 납치하는 무리야. 내가 널 발견하지 않았다면 넌 어둠의 도살자에게 끌려갔겠지. 내 이름은 라구아타야.”
“모건이에요.”
마을은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고 내부 역시 나무를 엮어 만든 집 몇 채가 모여있었다. 라구아타는 그중 하나로 나를 데려갔다. 모닥불 위에 끓고 있는 물을 토기 컵에 따라 나에게 건넸다.
“자 마셔봐. 따뜻한 걸 마시고 나면 좀 괜찮을 거야.”
따뜻한 차가 식도를 따라 내려감과 동시에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
“우주에서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우주 먼지가 우주선을 덮쳤고 난파되어 정신을 잃었어요. 여긴 어디죠?”
“우주? 우주선은 또 뭐야? 이곳은 어둠 세상이야. 낮이 없지. 그래서 어둠의 도살자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야.”
“낮이 없다고요?”
“그래. 그래서 이곳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돼. 그러니 조심해.”
라구아타와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갑작스럽게 함성 소리와 화살이 날아왔다.
“슈욱-, 와-!”
“젠장 어둠의 도살자들이 나타났어. 따라와!”
라구아타는 나를 데리고 뒷산으로 향했다. 횃불을 든 몇몇 사람이 우리를 쫓아오고 있었다.
“라구아타, 어디로 가는 거죠?”
“빛 세상. 자 저 동굴을 통과하면 돼. 그리고 자 이거 받아. 동굴을 통과할 때 널 도와줄 돌이야. 이 동굴을 따라가면 빛 세상이 나올 거야. 빛 세상이라고 마냥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 조심하고. 자 어서 가!”
라구아타가 건넨 돌은 작고 검은 맨질맨질한 돌이었다.
“라구아타 당신은 안 가나요?”
“응. 안 가. 너처럼 이곳에 오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 하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어서 서둘러!”
횃불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라구아타를 안고 마지막 감사 인사를 전했다.
순간 불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쑥-.”
허겁지겁 동굴 속으로 향했다. 두렵지만 멈출 수 없었다. 암흑 속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주머니 속 라구아타에게 받은 돌이 빛나기 시작했다. 빛나는 돌로 어둠을 밝히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동굴 너머 작은 빛이 보였다. 빛을 따라 동굴 밖으로 나서자 광활한 태양과 사막이 펼쳐졌다. 동굴 입구를 따라 사람들이 다 여섯 명 서 있었다.
“빛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합니다.”
무리 중 한 명이 꽃으로 만든 목걸이를 나의 목에 걸어줬다.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시장하시죠? 오실 줄 알고 연회를 준비했습니다. 함께 가시죠.”
생각해 보니 깨어난 뒤로 한 끼도 먹지 못했다. 허기가 밀려왔다. 사람들의 안내를 따라 마을로 향했다. 어둠의 세상에서 봤던 마을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마을 중앙 건물에 가까워지자 맛있는 냄새가 느껴졌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자 여기 앉으세요. 어서 드세요.”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생소한 음식들이었지만 하나같이 맛있었다.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체하겠어요.”
“아 네. 제가 급했네요. 근데 여러분은 안 드세요?”
“네. 저희는 배가 고프지도 않아요. 편하게 드세요.”
따뜻한 날씨와 친절한 사람들, 맛있는 음식까지. 이곳이 유토피아가 아닐까 싶었다. 배가 불러올 즈음 졸음이 몰려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스르륵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감옥에 갇혀있었다. 맞은편 감옥에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가 어디죠?”
“어디긴 어디야 감옥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식사 대접을 받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되긴 당한 거지.”
아차!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젠장...”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거 함부로 먹지 말라는 말이 떠올랐다. 자책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떻게든 다음 계획을 세워야 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둠의 도살자들에게 팔아넘겨지겠지. 난 너와 좀 다르겠지만.”
“네? 어둠의 도살자를 피해 이곳에 왔는데 다시 팔아넘긴다고요? 당신은 뭐가 다르죠?”
“난 뭘 좀 훔쳐 여기 있는 거야.”
“그게 뭐죠?”
“소녀들의 마음?”
“...”
“하하 장난. 유머 감각이 부족하시네. 근데 여기 사람 맞아? 뭔가 조금 달라 보이는데?”
처음부터 반말하며 농담하는 상대가 맘에 들지 않았다. 상대에게 내 정체를 순순히 밝혀도 되는지 잠시 생각했다.
“어둠 세상에서 어둠의 도살자를 피해 이곳에 왔어요. 동굴을 빠져나와서 사람들이 대접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빛 세상도 결국 똑같아. 어딜가나 어둠의 도살자는 존재하지.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야.”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늘 위로 태양이 떠 있지만 그 어디에도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 근데 여긴 왜 그림자가 없어요?”
“그림자가 뭔데?”
“네? 그림자를 몰라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순간 그림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손을 들면 땅에 생기는 그림자? 아니, 검은 무언가?”
“제정신이 아니네...”
무언가 이상했다. 동굴 밖을 빠져나왔을 때 보았던 태양이 그 위치 그대로 있었다. 설마 어둠 세상처럼 빛 세상에는 낮이 계속되는 건가?
“왜 해가 계속 하늘에 떠 있는 거죠?”
“빛 세상이니까. 어둠을 피해서 이곳에 온 거 아니야? 처음 오면 적응 안 될 수 있어.”
“설마 여긴 밤이 없어요?”
“어둠 세상에 낮이 없는 것처럼, 빛 세상에는 밤이 없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낮이 없는 어둠 세상, 밤이 없는 빛 세상이라니. 말문이 막혔다. 순간 어둠 세상에서 도망칠 때 들렸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허 오늘은 빠르네... 저기, 이제 곧 사람들이 올 거야.”
“네? 사람들이 오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데요?”
“팔아넘기겠지.”
“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감옥 안으로 쪼르르 하얗고 작은 돌 하나가 굴러왔다.
“세뇨리타, 선물.”
“네?”
“어둠 세상에서 가져온 돌과 지금 건넨 돌을 합쳐봐.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하얀색 돌이었다. 어둠 세상에서 받아온 주머니에 있던 돌을 꺼냈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늦장 부리다 후회할걸? 내가 아무에게나 이 돌을 주는 게 아니야. 착한 사람에게만 주는 거니 고맙게 생각하도록.”
“아저씨는요?”
“난 또 훔치면 돼. 소녀들의 마음 훔치는 것처럼... 왜? 세뇨리타도 벌써 나에게 마음을 도둑맞았나?”
“...”
“너처럼 이곳에 오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 하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어서 서둘러. 내 이름은 브라이언이야.”
“전, 모건이에요.”
감옥 너머로 창을 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돌 두 개를 포갰다. 검은 돌과 하얀 돌이 맞닿는 순간, 두 돌에서 빛이 났다.
눈 부신 빛이 몸을 감쌌다.
*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다. 반복되는 기계음이 들렸다. 몇몇 줄이 기계와 내 몸을 연결하고 있었다.
“모건, 이제 정신이 들어? 정말 다행이야. 운이 좋았어.”
“어떻게 된 거죠?”
“우주 태풍으로 우주선이 파손되었고, 정신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걸 구급대가 가까스로 구조했어. 지금은 지구이니 안심해.”
“저 살아있는 거 맞는 거죠?”
“그래.”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봤다. 창문을 통해 따스한 햇살이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 초록색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태양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림자가 일렁였다. 주머니에서 불룩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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