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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다방 야매소설 003] 이곳을 거쳐 가는 이들이

강다방 2025. 3. 27. 19:55

 

 

강다방 야매소설 시리즈 003
이곳을 거쳐 가는 이들이
지은이 강독두꺼비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현구님께 이 글을 드립니다.

 

돌담길을 걸었다. 앙상한 나무들이 보였다. 문득, 나는 고목일까 나목일까 궁금했다. 나무의 몇몇 가지에는 파릇한 새싹이 돋아있었다. 몇몇 가지는 지난밤 강하게 불었던 바람 때문인지 부러져 땅에 떨어져 있었다. 새싹이 난 채 널브러져 있는 가지를 주워 양지바른 화단 한편에 심어주었다.

영업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출근길 잠시 경로를 이탈해 주변을 산책했다. 나무 사이 새들의 지저귐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 입에서 입김이 나왔지만 따뜻하게 비추는 햇살 때문인지 그렇게 춥지만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어루만져 줬다. 몸도 마음도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추운 겨울날 창문을 열어놓고 푹신한 이불 속에 들어가 고개만 뺴꼼 내놓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윤슬서림을 이전하여 영업을 다시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다. 감사하게도 손님들이 정말 많이 늘었다. 책방을 처음 시작할 때는 과연 책을 팔아 먹고살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꽤 넉넉하게 생활하고 있다. 때로는 몇몇 사람들로부터는 책방을 운영하면 힘들겠네요 등의 위로 아닌 동정의 말도 들었다. 그때마다 슬펐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에게 책방으로도 먹고살 수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게 되어 뿌듯하다.

살면서 이런 경우가 흔치 않았는데 요즘 의욕도 열정도 많아졌다. 윤슬서림을 사랑해 주는 많은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 의욕과 역정에 상응하지 않은 체력이다. 매일 밤 달리기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조기축구에 나가 공을 차는데도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하루는 24시간. 아무리 애를 써도 24시간 하루를 보낼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돈을 그리도 추종하는 건,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요즘 따라 삶과 시간의 유한함을 몸소 느낀다.

매장에 도착했다. 매장 앞 의자에 오돌오돌 떨며 기다리고 계신 손님이 보였다. 영업시간 30분 전이었다. 서둘러 문을 열고 핫팩을 건네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렸다. 그저 그런 공간을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시는 것 같아 과분한 기분이 들었다. 손님은 이책 저책을 하나하나 펼쳐봤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매장을 나가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따뜻하게 오늘 하루를 시작했다.
 
매장을 얻을 때 가장 중요했던 점은 초록이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돌담과 나무가 참 예뻤다. 계약하기 전, 여러 번 매장 앞에 앉아 돌담 너머를 지켜봤다. 시간에 따라 빛이 변했다. 해 질 무렵 어둠과 따뜻한 색이 섞인 하늘은 그동안 차가웠던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줬다.

예전에는 공간을 지키는 것이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종종 다른 일을 한다는 핑계로 책방을 비워뒀다. 그런 나를 보고 손님들은 오히려 안쓰럽게 바라봐줬고 따뜻하게 감싸줬다. 이곳에서 보는 돌담과 나무, 햇살은 이런 나를 포근하게 보듬어 주는 힘이 있다.

점심시간 전후로 정신없이 손님이 몰려왔다. 밀려드는 손님처럼 바람 역시 강하게 불었다. 바람 때문인지 출입문이 덜컹덜컹 거렸다. 창밖 너머의 나뭇가지가 강하게 흔들렸다. 바람을 뚫고 한 손님이 매장으로 들어오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문이 바람에 빌려 벽과 부딪혔다.

“쾅”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 나는 곳을 향했다. 출입문 유리가 깨져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멍해졌고, 잠시 뒤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창문을 청테이프로 막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두부 넣은 된장찌개가 떠올랐다. 호박과 팽이버섯을 넣고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 늦은 시간이라 밥을 사 먹을 수 있는 곳도 없었다. 시간은 밤 10시, 그렇게 집에 도착하니 오히려 밥 생각이 없어졌다. 잠시 침대에 누워 15분만 쉬었다 다시 일어나 할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돌담길을 걸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앙상했던 나무에 노란 꽃이 피었다. 한국에서 개나리라고 불리는 꽃이었다. 개나리를 보면 봄마다 고향에 피는 노란 꽃 고스가 떠오른다. 부산을 거쳐 대구 소신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 뒤로 광주와 홍천을 지나 강릉에 왔다. 다른 도시에는 없는 푸른 바다가 강릉에는 있었다. 그래서 종종 바닷가를 찾았다. 해변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으면 저 푸른 빛 따라 내 고향 욜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한국에 온 지 20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일을 겪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몇 년 뒤 일본은 전쟁에 참전했다. 많은 이들이 전쟁에 동원됐다. 일본의 패망 이후 조선은 독립했고 남과 북으로 나뉘어 나라가 세워졌다. 평화와 희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찰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울었다. 춥고 배고픈 겨울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이곳 사람들은 살아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토마스 신부님 청승맞게 혼자 뭐하고 계세요? 날씨도 추운데 계속 계시면 감기 걸려요.”

소화유치원에서 근무하는 김선생이었다. 김선생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거 드세요. 막 쪄서 따뜻해요. 뜨거울 때 드세요. 신부님 고향에는 이런 거 없죠?”

“없긴요. 제 고향 아일랜드의 주식은 감자였습니다. 그래도 잘 먹겠습니다. 감자가 포슬포슬하니 맛있네요.”

자신도 배고플 텐데 음식을 챙겨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따뜻한 감자가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바람과 되비되어 마음속 한 켠에는 뭉클함이 느껴졌다. 한국에 오기 전, 아일랜드에서도 이렇게 바다를 보며 감자를 먹었는데...

“토마스 신부님, 제가 다른 신부님들보다 더 좋아하는 거 아시죠? 감자 드셨으니, 나중에 저한테 장가오셔야 해요.”

“커컥...”

뜻밖의 고백에 목이 막혔다. 정신을 차리고 이야기했다.

“저도 김선생과 백년가약을 맺고 싶지만, 저는 하나님과 평생을 약속한 몸입니다. 아쉽습니다.”

“농담이거든요?”

“신부님 세상은 왜 이리도 힘들고 허무한가요? 가끔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 때 이렇게 만드셨나 따지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바다를 보고 있으면, 뭐랄까 그 답을 알 것 같아요.”

김선생은 장가오라는 말이 무색하게 다음 달 내곡동 강씨에게 시집갔다. 하나님과 한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몸이지만, 한 편으로는 아쉽고 서운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선생의 앞날을 축복해 줄 수 있어 좋았다.

 

 


*

 

 


날씨가 풀리며 일이 많아졌다. 바쁜 와중에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간이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을 마치고 처소로 돌아왔다. 갑자기 몸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요즘 너무 무리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새싹이 돋은 채 떨어져 버린 가지가 보였다.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아이, 선한 사람들이 남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고민했었다. 그런데 문득 하나님의 뜻을 조금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머리를 스쳤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내일 세상을 떠나게 되어도 여한이 없을까? 아쉬운 게 있다면 무엇이 아쉬울까... 돌이켜보면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고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국전쟁 때, 죽음의 행진으로 포로로 잡혀간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침대 옆 비스듬하게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님... 이곳을 거쳐 가는 이들이 저희 안에 머물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소서”

 

 


 

 


"흑..."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생생한 꿈이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창밖을 보니 아직 해 뜨기 전이었다. 동틀 무렵 바다를 향해 차를 몰았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들고 간이 의자를 펼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꿈속의 신부님도 이 바다를 보았을까? 어두웠던 검은 하늘이 조금씩 옅어지더니 떠오르는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태양에서 내뿜는 따뜻한 온기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줬다. 그렇게 멍하니 한동안 바다와 하늘을 바라봤다.

출근 시간이 다가왔다. 회사로 가는 길, 옆에 있는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 앞에는 신부님의 동상이 서 있었다. 동상과 눈을 마주쳤다. 동상이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내 자신을 그저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더 잘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돌담 너머 앙상했던 나무에 여리고 푸른 잎이 돋아났다. 화려했던 꽃은 짧은 찰나를 끝으로 사라질 것이고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 태풍을 맞이하면 몇몇 가지들은 떨어질 것이다. 해충이나 바이러스 때문에 병에 걸리거나 운이 나쁘다면 벼락에 맞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설사 언젠가 사라진다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이 가고 끝내 봄이 오듯, 푸르른 새싹도 계속되리라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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