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Unsplash의Autumn Mott Rodeheaver
[두물결 글쓰기 모임]
계절의 변화처럼 느리지만 우리는 조금씩
'우리가 이 집에 20년 넘게 살면서 집 구조를 많이 바꿨어. 수리도 여러 번 하고, 옥상 올라가는 계단도 부엌이 아니라 거실에 있었지. 내 말은, 얼핏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전에 비해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다는 거야. 아궁이를 없애고 기름보일러를 들여놓고, 쥐도 안 나오고. 우리나라가 워낙 빨리 발전하잖니. 그러니까....'
-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한 주의 영업을 마치고 주문할 도서를 정리하다 8시가 넘어 퇴근했다. 늦게까지 영업하는 곳이 없어 (강릉에 있는 많은 음식점은 6-7시에 문을 닫는다) 맥도날드로 향했다. 맥도날드로 가는 길 뿌리염색 만원의 행복이란 단어를 발견했다. 요즘 행복이란 단어를 수집하고 있는데, 주문할 책이 있고, 야근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어쩜 행복한 일이 아닐까 싶다.
영화를 봤다. 만화가의 이야기였는데, 영화 자체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사람들이 남기 후기와 평이 더 좋았다. 불행은 때때로 우리를 찾아오고 현실은 무기력하지만 우리는 상상할 수 있고, 그 가능성으로 미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쌓아두기만 했던 꿈을 한 번 더 꺼내 도전해 봐야겠다.
알람 6개를 맞춰놓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알람, 아침 9시, 점심 12시, 오후 3시, 오후 6시, 저녁 9시. 각 알람 이름에는 '남은 하루 XX시간'이라고 적어놓았다. 점심 12시에 울리는 알람은 '남은 하루 12시간', 오후 6시에 울리는 알람에는 '남은 하루 6시간' 이런 식이다. 아침 9시, 점심 12시라고 생각하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은데, 남은 시간으로 바꿔보면 그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북쪽 끝에 있는 서점에 다녀왔다. 서점으로 가는 길, 주문진과 양양, 속초를 지났다.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옆으로 바다가 보였다. 예전 각 바다에 담긴 기억이 떠올랐다. 서핑을 배웠던 해변, 햄버거 먹으러 갔던 바다, 양양공항에 비행기 타러 갈 때 들렸던 카페, 추운 겨울 알바하러 갔던 바닷가 마을 등 추억이 몽글몽글 되살아났다.
여름을 지나 가을을 거칠 때쯤이 되면 강릉에 처음 왔던 때가 떠오른다. 당시에는 살 집도 못 구했고 차도 없었고 운전도 못 했는데, 이제는 1시간 거리까지는 큰맘 먹으면 운전도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나는 참 쭈구리였다. 많이 성장했구나.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해안도로를 달리는 나를 생각하니 좀 멋있어졌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는 느리지만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가을과 겨울의 사이 야근을 하고 저녁 먹으러 갈 때 만난 행복, 영화를 보고 난 뒤 한 번 더 다짐하는 꿈, 약빨이 며칠 안 갔지만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알람, 운전하며 흘려보낸 바다를 떠올리며 가을을 기록해본다.
부디 시간이 지나 지금을 되돌아보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하길, 꿈꾸던 것이 현실이 되었길, 소중한 것들을 잊지 않았길, 보다 많은 추억을 만들었길, 지금 보다 더 멋있어졌길 나와 당신에게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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