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인문 교양
옛 그림으로 본 조선 2 - 강원, 최열
조선시대 그려진 옛 그림들과 함께 그 시대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 낸 책. 관동(영동)지방의 특히 이름난 여덟 곳의 명승지 관동팔경을 시작으로 설악산과 오대산, 대관령과 강릉, 평창 등 옛 그림에 담긴 강원도 이야기가 담겨있다. 옛 그림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더욱 재미있다.
제목 : 옛 그림으로 본 조선 2 - 강원 (강원이여, 우리 산과 강의 본향이여)
저자 : 최열
펴낸곳 : 혜화1117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400쪽
크기 : 180x235mm
가격 : 35,000원
발행일 : 2024년 5월 25일
ISBN : 979-11-91133-23-3 (04910)
설악산의 이름은 살뫼다. 그러니까 설악雪嶽이란 저 살뫼를 한자로 바꾼 것이다. 말을 쪼개보면 살뫼의 살은 살린다이며 뫼는 산이다. 사람을 살리는 살림의 산이다. 실제로 강원도는 평야 대신 온통 산과 강이다. 백두대간의 허리이자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강원도는 산과 강의 본향이다. 흐르는 냇물은 대지를 적시는 어머니의 젖줄이다. 생명의 근원이요 살림의 원천이다. 그러고 보면 강원도는 사람의 땅이 아니라 하늘의 땅으로 사람을 살리는 대지의 모신이요 생명의 땅이다.
어린 시절 나에게 강원은 유람의 땅이었다. 중학생 시절 말로만 듣던 그곳에 처음으로 갔다. 광주에서 출발해 속리산 법주사를 거쳐 강원도 강릉에서 하룻밤 묵은 뒤 설악산에 올랐다. 태어날 때부터 눈을 뜨면 내 고향 덕유산이 늘 있었다. 성장기에는 무등산을 곁에 끼고 살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리산에 올랐다. 설악산을 마주하며 나는 산의 뜻을 바꿨다. 그동안 보아온 산들과는 한참 다른 감동을 느꼈다. 성장한 나에게 강원은 인문의 땅이었다. 역사의 증거인 문화유산에 탐닉하던 나의 발걸음은 유람자가 아닌 연구자의 것이었다. 사람의 향기, 문학의 서사, 미술의 서정에 담긴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산의 뜻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강원은 그저 자연이다. 설악산 북쪽에는 신성한 땅 금강산이, 남쪽에는 슬기의 땅 오대산과 신령의 땅 두타산과 태백산이 이어진다. 강원도는 그야말로 자연의 세계, 천연의 세계다. 자연은 스스로 '자'와 그러할 '연'이 므로 그냥 그렇게 있다. 살고 죽는 것은 자유자재하며 누구의 강요와 재촉에 의하지 않는다. 흔히들 사람에게 이로운 것을 올바르다 하고 해로운 것을 그르다고 하나 이는 근대 인본주의가 만들어낸 생각일 뿐이다. 조물주가 먹빛 어둠을 뚫고 우주를 창조할 때 그 주인을 사람이라고 명령했을 리 없다. 오직 조물주가 펼쳐내는 사물의 질서만이 존재할 뿐이다. 오늘날에도 강원 땅을 다닌다. 오늘날 강원은 예전의 그 땅이 아니다. 바뀌지 않은 데가 없다. 아예 마음을 내려놓지만 속상한 순간마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미 많은 이들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있 다. 가는 곳마다 베어내고 파헤치며 깎아낸다. 인제군 원대리에서는 2019년부터 축구장 70개 넓이의 천연림을 베어냈고 양양에서는 설악산의 대청봉을 10여 분 만에 올라가 즐기게 하겠다며 케이블카를 놓고 있다. 유리로 장식한 시멘트 고층 건물이 양양의 청초호를 포위했고 하늘을 찌르는 건축물이 강릉의 경포호 주변을 점령했다. 흙과 나무가 휘영청 정겨웠던 수변길마다 목책 같은 인공 시설로 감싸 두고 호반길이니 둘레길이니 한다. 자연 호수들마다 인공연못으로 바꿔놓았다.
강원을 그린 옛 그림을 정리하면서 내내 떠올린 것은 자연 중심주의였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그저 이상일 뿐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움을 이룰 수 있다면, 하는 상상만으로 그나마 위로를 삼을 뿐이다. 조화라는 말도 문득 돌아보니 공허하다. 자연의 일부일 뿐인 인간이 그 틀에서...
02 "이곳도 절경, 저곳도 승경이라" 219
설악산, 생명을 살리는 신성한 산 222
"천 개의 봉우리 우뚝 서 하늘을 찌르다" | 토왕의 호령 울려퍼지는 토왕골계곡 | 내원골계곡을 따라 신흥사에서 울산바위까지 설악의 얼굴 천불동계곡 | 쌍폭을 품은구곡담계곡 | 한계천계곡에서 세상 가장 큰 경천벽을 마주하다
오대산, 다섯 개의 연꽃잎에 둘러싸인 형상 249
뿌리가 깊어 오래된 이야기도 많은 땅 | 월정사를 거쳐 중대에 이르는 월정사 구역 | 하늘이 노닐만한 땅, 천유동 구역
영동, 백두대간 동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땅 271
대관령, 영동과 영서의 경계 | 강릉, 영동의 가장 큰 도시 | 금강과 설악을 품은 곳, 고성 | 동해를 가다, 두타산 무릉계곡에 오르다 | 삼척의 경이로운 풍경, 능파대 | 영동과 영남의 경계, 울진
영서, 백두대간 서쪽 내륙으로 이어지는 땅 303
평창, 대관령과 오대산이 닿은 땅 | 청령포와 낙화암의 땅, 영월 | 원주, 그림 속 그림 같은 홍원창마을 | 소양강 흐르는 곳, 춘천
곡운구곡, 화천에 감춰진 은일지사의 영토 322
곡운구곡의 탄생 | 제1곡 방화계, 바위와 꽃이 만발한 계곡 | 제2곡 청옥협, 옥같이 푸른빛이 나는 골짜기 | 제3곡 신녀협, 신녀의 골짜기 | 제4곡 백운담, 흰구름 흐르는 못 | 제5곡 명옥뢰, 옥구슬 울음 우는 여울 | 제6곡 농수정과 와룡담 | 제7곡 명월계와 제8곡 융의면 | 제9곡 첩석대, 겹으로 쌓인 바위 계곡
부록
'옛 그림으로 본' 연작을 마치며 368
난설헌허초희가 노래한 그곳
시냇물 흐르는 그 위에 커다란 언덕이라는 뜻의 강릉은 동해안의 중심인 하슬라 땅이었다. 이곳 출신 교산 허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강릉이야말로 '산천의 정기를 모은 곳으로 산수의 아름답기가 조선 제일인데 구경할 만한 곳으로는 경포대가 으뜸'이라 하였다. 1615년 12월 11일 중국 수도 연경에서 아침을 맞이한 허균이 고향 강릉을 떠올렸다. 간밤 꿈속에 고향 정원 돌아가 보니, 작은 누각 두어 그루 버드나무와 연못 사이 서 있었다. 깨고 보니 저절로 슬픈 나그네라, 세찬 바람, 눈을 몰아 창문에 아롱진다'고 읊조리며 눈물 짓던 허균은 어쩌면 25년 전 세상을 떠난 누이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난설헌 허초희와 경포 호수를 내달리던 어린 시절 그때처럼 세상 떠난 누이의 손길 와락 부여잡고 끝도 가도 없는 길 가고 또 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경포대에 올라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허초희가 나타난다. 경포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초당마을이 나온다. 허초희와 허균의 아버지...
무성했다. 죽음보다 아픈 사랑을 깨우친 이 남자는 그 여자가 살던 집 서쪽, 바로 그 절벽 위에 죽서루를 세워 영혼을 기렸다.
역시 고려시대 사람인 지월당 김극기金克己, 1379-1463의 「강릉팔경」에는 죽서루에 올라 읊은 시가 남아 있다. 이 시에는 죽죽서와 이승휴의 사랑에 관한 언급이 없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그저 전설이라 해도 아름다우면 그뿐인 것을.
그러나 오늘날 죽서루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나아가 더이상 죽서루가 아니다. 남은 것은 그저 옆으로 긴 건물 한 채뿐이다. 죽서루 맞은편 넓은 터에는 시립박물관, 문화예술회관이 즐비하고 이걸로도 모자라 해괴한 모양새를 드러낸 세계동굴엑스포타운이니 청소년수련관이니 동굴신비관이니 하는 것들이 줄지어 서있다. 멀리에는 주공아파트가 우뚝하게 들어오니 몇 해 전 이 풍경을 마주하며 그저 속절없이 망연해지고 말았다. 죽서루는 사라졌다.
해괴한 풍경이 없던 시절에는 저녁놀 머금은 태백산과 백두대간이 아득히 펼쳐지고 가까이에는 근산이며 오십천이 구비구비 흘렀다. 그 풍경이 어찌나 아름...
설악산은 예전에 속초와 양양 영역에 속한 산을 가리켰다. 하지만 20세기에 접어들어 본래 설악산을 외설악이라고 한 뒤 예전 인제군 영역의 한계산을 끌어들여 내설악이라고 했다. 또한 내설악 남쪽 장수대 지구와 외설악 남쪽 오색약수 지구를 분리해 남설악도 만들어냈다. 그러니까 지금 설악산은 내설악, 외설악, 남설악으로 나뉘어 세 개의 설악으로 넓어졌다. 금강산을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구분한 것을 따른 걸까.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20세기 사람들은 설악이 금강을 이기지 못한다고 여겼던가보다. 결국 1967년 한글학회가 편찬한 『한국지명총람』에는 '아름다운 경치는 금강산 다음가는 절세의 가경을 이루어 남한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다고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금원은 「호동서락기」에서 '천 개의 봉우리 우뚝 서 하늘을 찌르는데 가벼운 안개 퍼지니 그림보다 낫다'고 노래하며 '금강과 어깨를 겨루었다’고 했다.' 버금간다는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다. 김금원의 이런 마음이 더욱 좋다.
외설악을 품고 있는 속초는 설악산에서 발원해 동해를 향해 흐르는 쌍천을 감싸고 있다. 북으로는 고성, 남으로는 양양과 인접해 있어 항상 양쪽에 부속되곤 했다. 속초시 도문동은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주요 관문이다. 속초와 양양 사이에 있는 물치리 삼거리에서 서쪽을 보면 신흥사를 향해 가는 도로가 뚫려 있다. 도로는 널찍하기 그지없는....
뿌리가 깊어 오래된 이야기도 많은 땅
오대산은 금강과 설악의 화려하고 기이한 생김에서 벗어났으며 봉우리는 완만하고 또 가파른 계곡도 드물어 마치 제집인 듯 포근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섯 봉우리가 고리처럼 벌려 섰고 크고 작은 것이 고른 까닭에 오대라 이름하였다'고 했는데 정곡을 찌른 것이다. 실제로 높이 1,563미터의 주봉인 비로봉과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만월봉까지 모두 다섯 봉우리가 높낮이 없이 평평하고 또한 산세로 보면 다섯 개의 연꽃잎에 둘러싸인 모양이다. 이 다섯 봉우리와 더불어 다섯 곳을 중대, 북대, 서대, 동대, 남대로 지목하고 그 자리에 중대 사자암, 북대 미륵암, 서대 수정암, 동대 관음암, 남대 지장암 등 각각 암자를 세워놓았다.
오대산을 말할 때는 문수를 빼놓을 수 없다. 오대산의 주인 문수는 지혜로움이 절묘하고 어질기 그지없다는 뜻의 묘길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부 처의 제자였다. 항상 상서로움이 넘쳤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늘이 노닐 만한 땅, 천유동 구역
청학산은 19세기까지 명주군이라 부른 강릉 땅에 있는 산이었다. 높이 1,407 미터의 황병산을 주봉으로 매봉, 천마봉, 노인봉, 백마봉을 거느린 깊은 산이다. 이처럼 즐비한 봉우리들이 마치 날개를 활짝 펼친 학 같다고 하여 청학산이란 이름으로 불러왔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20세기에 접어들어 오대산에 흡수시킨 다음 그 이름을 소금강이라고 바꿔 부르고 있다. 잘못된 기록을 근거삼아 멀쩡한 산 하나를 없앤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거듭 말하지만, 『대동여지도』를 보면 오대산과 청학산이 동서로 엄연히 나뉘어 다른 산임을 알려준다. 청학산 기슭에는 청학동계곡과 구룡폭포계곡이 아주 또렷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청학산의 날개를 접어 오대산의 품속으로 밀어넣었다. 산은 말이 없으나 뜻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산이 청학산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청학산에 위치한 천유동 구역은 그 이름처럼 하늘이 노닐 만한 땅이다. 기암 괴석과 폭포, 못이 즐비하여 절경지인 까닭이다. 예전에는 무릉계를 경계 삼아 청유동을 안과 밖으로 나누었지만 바깥쪽은 무참한 파괴로 말미암아 경관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무릉계 안쪽만 남아 이곳을 청학동이라거나 소금강이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입구의 수령 480년인 금강송을 지나면 이어지는 연화담 근처에는 여승들이 사는 금강사가 있다.
평창, 대관령과 오대산이 닿은 땅
평창은 고구려 이래 까마귀가 무성하게 빛난다는 뜻의 욱오 또는 울오 라는 이름으로 불러온 고을이다. 까마귀는 신의 전령으로 고구려를 상징하는 새였다. 고려 때 평창으로 그 이름을 바꿨는데 평창이란 기운이 충만하여 올곧은 땅이라는 뜻으로 원래의 이름을 계승하되 까마귀만 버린 것이다. 평창은 동쪽에 높이 832미터의 대관령을 품고 있으며 신라의 자장으로부터 조선 세조와 인연이 깊은 오대산이 있는 신성한 땅이다. 또한 조선왕조를 개창한 창업 군주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고조할머니 효공왕후孝恭王后의 고향인 까닭에 특별한 대우를 받은 행정 구역이었다.
청심대는 평창군 진부면 마평리의 오대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다. 예전 그대로는 아니다. 지금의 청심대는 20세기에 들어와 지은 것이다. 정자 앞에 불쑥 솟아오른 바위가 솟구쳐 있다. 신기하게도 두 개로 나뉘어 있는데 세종 때 기생 청심이 이곳 바위 벼랑에서 몸을 날려 죽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청심은 당시 강릉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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