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일곱 뿌리의 강릉이야기
천년 솔향의 토박이 소리
저자 김동철
성원인쇄문화사
27 군선강과 명선문
강릉에도 강이 있다고 어른들께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유일하게 강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군선강이다.
군선강은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모전리를 지나 안인리 관마을 앞에서 임곡천과 합류하여 해령산 옆 명선문을 통해 바다로 나간다.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워 신라 때 화랑인 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이 놀았던 곳이라 하여 군선강이라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江은 규모 및 길이 등으로 급수에 따라 명칭이 정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강릉의 군선강은 1급도 아닌 2급 하천인데 왜 이라고 했을까?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과제다.
명주군왕의 성지(굴산사터)에서 화랑(영랑, 술랑, 남석랑, 안상랑)들이 2급 하천에서 무예를 익히고 놀았다고 하기는 조금 그렇다. 따라서 강 이름도 群仙江(군선강)이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群仙江이 바다로 흘러나가는 곳의 명칭도 溟仙門이라고
이곳은 신라의 화랑들이 험한 육로로 온 것이 아니라 배를 타고 경주에서 이곳으로 왔다고 전한다. 또한 이곳에는 말을 갈아타는 역말(역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능한 추측이기도하다. 따라서 가까이에 한송호와 송정(녹두정) 주변은 경치도 아름답고 화랑들의 무예 훈련장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단경골에 명주군의 2만군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쌀 씻은 희뿌연 물이 군선강으로 일년 내 계속 흘렀다고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허월스님(명주 성주 김순식의 아버지)과 김예가 궁예와 왕건을 맞이 했던 곳으로도 추측된다. 또한 김순식은 명주성을 지키는 대장군이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휘하에 2만명의 군졸이 있었다고 한다.
명주는 당시 김주원의 왕국이었으며 군대가 함께 있었다.
따라서 왕이 계시던 이곳에 흐르는 내(川)도 격을 높여 군선강이라 부른 것으로 추측 된다.
57 등명낙가사와 헌화로
강릉에서 정동진으로 가는 길에 아름다운 사찰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사찰이 괘방산 아래에 위치한 낙가사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일명 '등명낙가사'라고도 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창건하고 수다사(水多寺)라 하였다.
자장이 이 절에 머무를 때, 꿈속에서 중국 오대산의 북대(北臺)에서 보았던 스님이 나타나 말하기를 “암자 아래 큰 소나무 밑에서 꼭 만나자."고 하여 이튿날 그 자리에 갔더니 그곳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날 수 있었다고 전한다.
신라 말기의 병화(兵火)로 소실된 뒤 고려 초기에 중창하여 등명사(燈明寺)라 하였다가 지금은 등명낙가사라고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릉부 동쪽 30리에 이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등명사라 한 것은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볼 때 이 절이 강릉도호부 내에서는 등화(燈)와 같은 위치에 있고, 이곳에서
공부하는 수학도(修學徒)가 3경(三更)에 등산하여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한데서 연유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재 절 근처에는 고려성지(高麗城址)가 있다. 이 성은 고려시대에 등명사의 중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기 위해서 창고를 짓고 성을 쌓았다는 사방 1m의 석성이다. 이로 보아 당시의 사찰 규모를 짐작 할 수 있으며, 조선 중기에 등명사는 거의 폐허가 되었는데 그 뒤 1956년 경덕(景德)이 옛터에 절을 중창하고 낙가사라 개칭하였으며, 1997년 영산전을 지었다. 1982년에는 청우(淸宇)스님께서 극 락전 · 약사전 · 삼성각 · 범종각 · 요사를 건립하였으며, 지금도 청우(淸) 스님께서는 불사에 전념하시며 불교계의 거목으로 활동 중이시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 극락전 ·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일명 大靈山殿) · 요사채 등이 있다. 오백나한전 안에 안치된 오백나한상은 인간문화재 유근형(柳根灐)이 5년에 걸쳐 만들어서 1977년 10월에 모신 것이다. 500구가 각기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는 이 나한상은 다른 곳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청자 불상이다.
또한, 이 절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7호인 등명사지오층석탑이 있으며, 창건과 함께 선덕여왕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이 탑은 은은한 무늬로 조각된 옥개석의 귀퉁이가 조금 파손되었고 기단석은 연꽃무늬로 수 놓여 있다. 특히 2층 기단부에는 돌자물쇠를 채워 놓았던 관계로 탑 안의 보물이 도굴되지 않은 채 보존되어 왔다고 한다. 원래는 이와 같은 탑이 3개였는데, 하나는 함포사격으로 파괴되어 그 잔해만이 바닷가에 남아 있고, 또 하나는 수중탑(水中塔)이었으나 언제부터인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사찰 아래에는 등명약수(燈明藥水)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리고 청우)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헌화로는 당시 지리적 환경으로 보아 경주에서 강릉으로 오는 육로가 없었으며, 당시 해상으로 왕래했다고 보아 안인의 명선문이 강릉의 관문이고 보면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 차 당도한 등명낙가사 아래쪽 해변에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이곳이 헌화로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전설속의 헌화로는 현실에 부합되는 스토리텔링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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