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서점 출판사 창업 운영/2023 강동면 마을문화디자이너

강릉시 강동면 관련 도서 서적 (강릉 고을 땅 이름 유래)

강다방 2023. 10. 23. 16:49

 

 

 

 

강릉 고을 땅이름 유래
김기실 지음

 

 

 

 

 


1. 강동면(江東面)

강동면은 본래 명주군 2읍(묵호읍· 주문진읍) 7면의 하나로 강릉군 자가곡면 이었다. 자가곡면은 심곡진·고성동·등명· 정동진·산성우·임곡·안인진·안인·안인염전·안인소동·모전·상시동·운산·신석·하시동·월호평의 16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함에 따라 심곡·정동진·산성우·임곡·안인·안인진·모전·상시동·하시동·운산의 10개리로 개편되고, 1983년 2월 15일 읍면행정구 역조정으로 언별리가 구정면에서 편입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운산리가 강릉시로 편입되었다. 강동은 본래 잰골(可谷)이었는데, 1916년 군선강 동쪽이 된다고 하여 강동으로 고쳤다.

면내에는 만덕봉에서 발원한 군선강이 흐르는데, 이 물은 언별리 단경골에서 발원하여 모전리, 임곡리, 대동리를 거쳐 넓은 들을 이루고, 안인진리 해령산 낙맥에 있는 명선문에서 바다로 빠진다. 또 피래산에서 발원한 정동천, 덕고개에서 발원한 와천이 흐르고 있다.

강동에는 강동초등학교·정동초등학교·임곡초등학교·정동초등 학교 심곡분교(폐교)가 있고, 영동화력발전소·안인역·정동진역이 있고, 또 해안에는 6개의 나루(안인진·대포진·등명진·정동진·심곡진·금진)가 있는데, 이를 강동6진(江東六津)이라 한다. 상시동리에 면사무소가 있고, 안인진리 대포동에는 조선조 중종 때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주둔했었다.

면의 총면적은 112.22 km2이고, 강릉의 남동단에 위치하여 동쪽은 바다. 서쪽은 구정면, 남쪽은 옥계면, 북쪽은 월호평동과 접해 있다.

 

 

 

 

 


1) 대동리(大洞里)

대동리는 본래 강릉군 자가곡면 지역으로 1916년에 안인염전리·큰말·솔밭말·지섯거리·장거리·관말을 합쳐 안인리로 되었다가 1996년 1월 1일 큰말이 있어서 대동리로 되었다. 이 마을은 원래 강릉 칠사당을 중심으로 동쪽이 되어 강릉의 동쪽이 편하다는 뜻으로 안인 (安仁)이라 했는데,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동쪽은 인, 서쪽은 의, 남쪽은 예, 북쪽은 지, 중앙은 신을 나타낸다. 서울의 동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을 홍지문(弘智門)이라 하고, 성 안에 있는 건물을 보신각(閣)이라 한다.

마을에는 조선조 때 대창도에 딸린 안인역이 있었고, 안인리·모전리·언별리를 통칭하여 안인동이라 했는데 언별리 송담서원 앞 내 다리부근에 있는 큰 바위에 '안인동송담(仁洞松潭)'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마을엔 안인 기차정거장·영동화력발전소·강릉경찰서 강동파출소가 있고, 동쪽으로는 바다·안인진리, 서쪽으로는 모전리와 하시동리, 남쪽으로는 모전리·안인진리, 북쪽으로는 하시동리와 접해 있다.

 


· 장터(장거리) - 모전리에서 7번 국도를 따라 오면서 지서가 있던 길거리. 6.25 한국전쟁 전까지 이곳에 장이 서서 생긴 이름인데, 마을 사람들은 강릉으로 장을 보러 가지 않고, 이곳에서 간단한 장을 봤다고 한다.
· 관터(관마을) - 장터(장거리) 조금 아래에 있는 마을. 조선조 때 나라에서 집을 지어 놓고 화비령으로 넘나드는 나그네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던 관아가 있었던 곳이다.
· 병때소 - 장터 뒤 군선강에 있는 소.
· 지섯거리 - 장터 아래에 있는 길거리. 예전에 이곳에 지서가 있었다.

 

 

 

 

 


· 목넴이 - 파밭골 아래쪽에 있는 골.
·염전밭 - 마을 동북쪽 바닷가로 현재 영동화력이 있는 일대. 예전에 이곳에 있는 밭에 바닷물을 퍼부어 소금을 구웠던 염전이 있었다.
· 갯밭 - 염전터에서 풍호로 가는 도중에 있던 넓은 밭.
· 안인들 - 마을 앞에 있는 넓은 들.
· 새말 - 화력발전소 위쪽에 있는 마을.
· 안장거리 - 마을에서 안인진리로 가면서 군선교 남쪽에 있는 산줄기.

2) 모전리(茅田里)

모전리는 본래 강릉군 자가곡면 지역으로 마을에 띠(草)가 많이 자란다고 하여 띠앗 · 또는 모전이라 하였는데, 1916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일부지역을 갈라서 모전이라 하고, 그 나머지 지역은 언별리·안인리로 되었다.

 

 

 

 

 

 


옛부터 이곳 일대가 늪이어서 띠가 많이 자라 띠밭(뙈
지·떼밭)이라 했으며, 또 이곳에 왕골의 일종인 줄(포아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 못이나 물가에 자라는데 구황식물로 어린 싹과 함께 먹고, 잎은 도롱이·차양·자리를 만드는데 쓴다)이 많이 났는데, 줄로 자리를 매 제사 때 쓰면 후손들이 잘 된다고 한다. 옛말에 마을 앞산에 사태가 나면 만석군이 나온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곳에 광맥이 있어 산을 무너뜨리니 마을이 잘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 있는 산줄기 마지막 낙맥에 태봉이 있고, 마을 앞으로 군선강이 흐르는데 만덕봉과 망덕봉에서 발원한 물이 10년에 한번씩은 큰물이 흘러 범람한다[十年有大一大水]고 한다. 마을 남쪽 멀리 있는 멍덕봉에 구름이 완전히 끼어 봉이 보이지 않으면 비는 오지 않는데 구름 이봉 허리를 조금 감싸고 돌면 마을엔 비가 온다고 한다.

마을 동쪽으로는 안인진리·안인리, 서쪽으로는 언별리·상시동리, 남쪽으로는 임곡리, 북쪽으로는 상시동리·하시동리·안인리와 접해 있고, 마을에는 강동초등학교·농협단위조합·장안성터가 남아 있다. 1리와 2리는 1991년 12월 27일 '명주군 반 운영 규칙 제 771호'에의 해 나눠졌는데 군선강 북쪽이 1리, 임곡천 동쪽과 북쪽이 2리가 된다.

1리
· 됏찌(田・돼지) - 마을전체의 이름. 예전에 사람들이 살지 않았을 때 이곳에 띠가 무성하게 자라 전부 띠밭이어서 생긴 이름이다.
· 돌멩이(乭坪. 새말) - 1반의 소지명. 언별리와 경계인 언덕 밑에 있는 마을, 돌(乭)은 돌(石)의 이두식 표기이다. 예전에 이곳이 전부 돌 밭이었는데 뙛찌 마을이 생긴 다음 새로...

 

 

 

 

 

 

 

첩으로 시집가는 자신을 한탄하며 크게 울었다고 한다. 정식혼례가 아니기 때문에 가마의 꼭지를 떴던 것이다. 또 예전에 양반들이 강릉에서 남쪽으로 갈 때 가마를 타고 가다가 길이 험해 이곳에서 가마에 내려 걸어갔는데, 화비령재가 험해 가마를 타고 갈 수 없으니 이곳에서부터 걸었다고 한다. 가마에서 내려 가마를 떼고 화비령을 넘었다고 한다.

· 문짝골 - 가마떼기에서 임곡리로 가면서 서낭을 지나 왼쪽에 있는 골.
· 괴일재 - 문짝골에서 화비령으로 가는 옛길.
· 성재 - 가마떼기에서 정동진리로 가는 재.

3) 산성우리(山城里)

산성우리는 본래 강릉군 자가곡면 지역인데, 1916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귀나무골·명계동·방재·성재·숯가마말·오리동과 정동진리 일부를 합쳐 성재의 산모퉁이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산성우리는 강동면 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남쪽에는 방재, 북쪽에는 화비령이 있는데, 이곳으로 굴을 뚫고 옛 동해고속도로가 지나간다. 한 행정리에 고속도로 굴이 2개(화비령굴·방재굴)가 있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마을은 동쪽으로는 심곡리·옥계면 금진리, 서쪽으로는 임곡리, 남쪽으로는 옥계면 낙풍리·옥계면 북동리, 북쪽으로는 정동진리·임곡리와 접해 있다.


1리

· 오리동(梧里洞) - 1리 마을 전체의 이름. 예전에 이 일대가 늪이었고 오리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생긴 이름이다. 옛 동해고속도로 화비령 굴 남쪽 나들목 옆에 있는 마을이다

· 불율산(佛律山) - 오리동에서 화비령 쪽에 있는 산. 옛부터 이 산은 명산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있는 산신당에 가서 치성을 드렸다. 산신당에는 산신·삼신·칠성신 등 세 신의 초상화가 있고, 그 옆 서북쪽으로 30여m 떨어진 곳에 샘이 있는 데 치성을 드릴 때 이 물을 떠서 쓴다. 이 물은 아무리 떠도 샘이 마르지 않는 데 부정한 사람이 물을 뜨면 물이 까맣게 된다고 한다.



 

 

 

 


병창골 - 피내골 제일 안쪽에 있는 골. 임곡리와 경계지역으로 벼리가진 곳에 너래바위가 있다.


4) 상시동리(上詩洞里)

상시동리는 본래 강릉군 자가곡면 지역으로 시동의 위쪽이 되어 상시동·웃말이라고 하는데, 1916년 재궁골·골말·뒷골·서당말·옥골·뒷고개·하시동 일부를 합쳐 상시동리로 되었다.

시동은 원래 마을에 절이 있어서 절골이라 했는데, 이곳엔 들이 많고 예부터 부자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 부자 선비들은 시와 풍류를 즐기며 생활했는데, 그 선비들 가운데 삼가 박수량의 후손인 완하당 박진해(朴震楷)가 이웃에 있는 안인에서 살다가 이곳에 오니, 글을 숭상하는 선비들이 많아 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지라 절골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절골의 한자 이름인 사동(寺洞)에서 절 '사(寺)'자 앞에 말씀 '언(言)'자를 붙여서 시동(時洞)이라 하였다. 시동은 넓어서 서쪽 마을을 상시동, 동쪽에 있는 마을을 하시동이라 하는데, 이 마을은 오방수(午方水)가 들어오는 곳이어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마을은 동쪽으로는 하시동리·모전리, 서쪽은 운산리·구정면 덕현리, 남쪽은 언별리·모전리, 북쪽은 운산동·월호평동과 접해 있다.

1리는 7번 국도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고, 2리는 국도 서쪽에 있는데, 상시동리에는 강동면사무소·강동보건지소·농협지소가 있다.


 

 

 

 


5) 심곡리(深谷里)

심곡리는 본래 강릉군 자가곡면 지역으로 심일. 지필 또는 심곡이라 하다가 1916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심곡리로 되었다. 심곡은 '깊은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짚일·깊일이라 하는데, 짚일을 연철하여 지필(筆)로 음차하여 쓴다. 지필이란 '마을이 종이를 땅바닥에 깐 듯 평평하고 그 옆에 붓이 있는 형국'이란 뜻인데, 이곳에 묘를 쓰면 글 잘하는 후손이 난다고 하여 많은 집안들이 묘를 썼다. 마을을 처음 개척한 성씨들은 경주 최씨. 전주 이씨들이나 지금은 각성받이들이 모여 살고 있다.

마을 뒤에는 피래산에서 동쪽으로 내려온 산줄기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이 산줄기 동쪽은 바다이고 이 바다에서 나는 미역·김은 동해안에서 제일 유명한데, 특히 이곳에서 나는 미역은 임산부한테 좋다고 한다. 마을은 해변에서 100여m 높이에 평평한 넓은 고원지대며, 해변쪽으로 푹 파인 좁고 긴 골에 마을이 있고, 그곳에 포구가 있는데, 이 포구는 강동6진 가운데 하나인 심곡진이다.

마을은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산성우리, 남쪽으로는 옥계면 금진리, 북쪽으로는 정동진리와 접해 있고, 포구에서 해안을 따라 옥계면 금진리로 가는 헌화로가 새로 생겼다. 마을엔 정동초등학교 심곡분교가 있다가 폐교되었다.

· 큰골 - 옛 학교터에서 본말(포구)로 내려가는 큰 골.
· 작은골 - 본말 왼쪽에 있는 골. 산성우리로 넘어가는 골이다.

 

 

 

 

 

 


신라 때 향가인 「헌화가」에서 따온 이름으로 신라 선덕왕 때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순정공이 부인(수로)과 같이 점심을 먹고 있는데, 이 때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쳤다고 한다.
· 합궁골 - 헌화로에 있는 골짜기.


6) 안인진리(安津里)

안인진리는 본래 강릉군 자가곡면 지역으로 조선조 성종 때까지 안인포(安仁浦) 수군만호영(水軍萬戶營)이 있어서 안인날기·안인날개·안인나룻말 또는 안인진이라 하다가 1916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갯목·안인소동리·모전리 일부를 합하여 '동쪽에 있는 나루'여서 안인진리로 되었다.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인은 동, 의는 서, 예는 남, 지는 북, 신은 중앙을 나타낸다.

군선강 하구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엔 봉화를 올리던 해령산이 있고, 그 중턱에 해령사와 해랑당이 있고, 동쪽 밑 바닷가에 강릉의 삼문 가운데 하나인 명선문(溟仙門)이 있다. 마을 뒤는 화비령 북쪽 낙맥으로 이곳이 천리행룡 만리안대(千里行龍 萬里案臺)의 명당인데, 이곳에 강릉 김씨 집안에서 묘를 쓰고 집안이 크게 번성했으나, 건너 바닷가 염전에서 소금을 굽기 위해 불을 계속 땠기 때문에 그 운이 다했다고 한 다. 그런데 소금을 굽기 위해 불을 때는 곳에 지금은 영동화력발전소가 생겨 그곳은 불을 계속 지피기 때문에 마을에 기운이 다했다고 한다.

 

 

 

 

 

 


1리는 농사를 짓는 농촌이고, 2리는 고기를 잡는 어촌이어서 1리와 2리는 마을 일을 같이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은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모전리·임곡리, 남쪽으로는 정동진리, 북쪽으로는 대동리와 접해있다. 바닷가에 포구가 있는데, 이 포구는 강동6진 가운데 하나인 안인진이다. 포구에는 동해해양경찰서 안인진출장소가 있다.

1리

· 송촌(松村) - 1리 마을 전체의 지명. 예전에 마을에 소나무가 숲을 이뤄 생긴 이름이다.
· 삼거리 - 7번 국도에 대동리(안인리), 모전리, 안인진리로 갈라지...

 

 

 

 

 

 


· 구로대(九老臺) - 영하대 부근에 있던 바위. 경치가 좋기로 소문이 가 아름답지 않다. 넓은 바위에 영주음사(社)와 계원들의 이 난 곳인데, 예전에 강동면에 사는 선비 가운데 80세 이상 되는 9명이 모여 시문을 짓고, 서로 촌평을 하며 풍류도 즐기며 우정을 돈독히 했다고 한다.

7) 언별리(彦別里)

언별리는 본래 강릉군 구정면 지역으로 언별이라 하였는데, 1916년에 가둔지·단경골·장재기와 모전리 일부를 합해 언별리라 하고 하구정면(구정면)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2월 7일에 강동면에 편입되었다.

 

 

 

 

 

언별리는 송담서원으로 공부하러온 유생이 이 마을에 사는 유부녀를 겁탈했는데, 그 남편이 유생에게 보복할 수는 없고 그래서 몰래 서원에 불을 지르니 서원이 불에 타 없어지자(1804년 3월 1일) 유생들이 공부 할 장소가 없어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을 안인동이라 했을 때, 난리가 나서 선비들이 험한 이곳에 피난을 와 공부를 하다가 난리가 평정되자 각자 자기 고향으로 떠나갔는데 선비들이 떠났다고 하여 마을이름이 생겼다.

마을에는 율곡 이이의 위패를 모신 송담서원(지방유형문화재 제44호)이 있는데, 송담서원은 언별리의 옛 이름인 송계리(松溪里)에서 ‘송'자와 황해도 해주에 있는 석담서원(石書院, 율곡 선생이 제자들을 모아 글을 가르친 서원)에서 '담'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송담서원은 강의실이 90여 칸이나 되어 많은 유생들이 이곳에 와 공부를 했다.

마을 안쪽에는 망덕봉과 만덕봉에서 내려온 줄기가 뻗어있고, 그 줄기 사이에는 경치가 좋은 단경골이 있다. 마을은 동쪽으로는 임곡리, 서쪽으로는 왕산면 목계리 · 구정면 어단리, 남쪽으로는 옥계면 북동리·왕산면 목계리, 북쪽으로는 구정면 어단리·금광리·덕현리·강동면 상시동리와 접해있다.

 

 

 

 

 


· 북장작- 장제기 북쪽에 있는 골.
· 돌분터 - 북장작 북쪽에 있는 터. 이곳에 돌무더기가 여러 개 있다.


8) 임곡리(谷里)

임곡리는 본래 강릉군 자가곡면 지역으로 숲이 많아 숲실, 또는 임곡이라 하였는데, 1916년에 대수원이·밤나무쟁이·큰골·절골·재궁골·재밑·갈보다니를 합해 임곡리로 되었다. 숲실은 바늘과 실 형국(型型)이라 하는데, 예전에 도선(道詵, 신라 말의 승려)이 이 곳에서 잠을 자다가 깨 얼핏 주위를 둘러보고,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이곳의 지명을 물으니 숲실이라 하자, 숲실에는 실에 해당하는 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곳을 선침형이라 했다. 즉 바늘을 매달아 놓은 형국, 바늘에 실을 꿰매는 형국이라 하는데, 이곳에 '천리행룡(千里行龍)에 만리안대(萬里案臺)'의 명당이 있다. 강릉 향언에 한 곳에 가만히 있지 않고 쏘대다니는 것을 보고 “숲실 개 쏘대듯" 하다고 한다.

이 마을은 신안 주씨·한양 조씨·강릉 함씨가 개척하였고, 마을에는 임곡초등학교와 임곡보건진료소가 있고, 동쪽으로는 산성우리, 서쪽으로는 언별리, 남쪽으로는 옥계면 북동리, 북쪽으로는 모전리·안인진리와 접해 있다.


1리

· 화비령 - 마을과 정동진리 · 산성우리 사이에 있는 큰 고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강릉)부 남쪽 35리에 있다. 영의 흙이 검어서 불에 탄 것 같은 까닭에 회비(飛)라 이름한 것이다” 라고 기록...

 

 

 

 

 

 


9) 정동진리(正東津里)

정동진리는 본래 강릉군 자가곡면 지역으로 마을 가운데 강원도 고성에서 떠내려 온 고성산이 있어서 고성동이라 했고, 그후 임금이 거처하는 한양에서 정동쪽에 있는 바다란 뜻으로 정동진이라 하다가 1916년 고성동·등멍이를 합쳐 정동진리로 되었다.

마을 한가운데로 피내에서 발원한 정동천이 흐르는데, 내를 중심으로 서북쪽이 1리이고, 동남쪽이 2리가 된다. 예전에 이곳 주민들이 이 냇물을 먹었는데, 그때 1리 마을은 냇물이 흐르는 쪽으로 내리 퍼 먹고, 2리 마을은 물이 흐르는 반대로 치 퍼 먹어 서로 속이 다르다고 하여 조그마한 내를 중심으로 미묘한 지역적 편견이 있었다.

마을에는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이 있는 정동진기차역이 있고, 그 외 강동면사무소 정동출장소(1998년 10월 폐지)·정동진보건진료소·정동우체국·정동초등학교·등명낙가사·등명사지 5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37호), 바닷가에는 모래가 고운 등멍이해수욕장. 고성해수욕장·정동진해수욕장, 포구에는 동해해양경찰서 정동출장소, 마을 뒤 괘방산에는 고려성지(강원도기념물 제79호)가 있다. 정동천 하구엔 포구가 있는데, 이 포구는 강동6진 가운데 하나다. 정동진리와 심곡리에서 나는 돌김과 미역은 적국적으로 유명하여 특히 임부들이 많이 찾는다.

마을은 동쪽으로는 바다. 심곡리, 서쪽으로는 산성우리·임곡리, 남쪽으로는 산성우리·심곡리, 북쪽으로는 안인진리와 접해 있다.


 

 

 

 


· 짱터 - 정동진역 북쪽 옛 저탄장이 있던 일대. 이곳이 평지여서 예전에 나무꾼들이 나무를 한 짐 해 지고 오다가 이곳에 와 쉬면서 편을 갈라 짱을 쳤다고 한다.
· 넘말 - 정동진역이 있는 그 일대. 고성산 너머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 고성산(高山) - 정동진역 앞에 있는 산. 옛날에 이산이 큰 포락에 강원도 고성에서 떠내려와 여기에 있게 되었다. 그후 고성사람 들이 인심이 고약해 이 산이 자기네 산이라 하여 매년 땅세를 받아 갔는데, 어느 한 해 마을에 가뭄이 들어 땅세를 낼 수 없어서 주민들이 지혜를 짜서 땅세를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젠 돈이 없어 못 주니 산을 가져가라”고 하면서 뱃장을 부렸다. 그러니 산을 도저히 가져갈 수 없어서 그냥 돌아가고 그후부터 사람들은 땅세를 물지 않 았다고 한다. 봉 꼭대기에는 영인정과 정동표시판이 있다.
· 고성동 - 고성산 밑에 있는 마을. 정동진역 앞에 있는 마을로 우체 국·농협· 서낭당 등이 있다.
· 마귀바위 - 고성산꼭대기 북쪽에 있는 바위, 바위의 모양이 사람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고성산이 북쪽에서 떠내려 왔기 때문에 고성산에 있는 바위도 같이 떠 내려와 자기의 고향인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 앞재 - 정동초등학교 앞 다리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재.


2리
·  정동들(正東坪) - 정동진리에 있는 넓은 들.

 

 

 

 

 

 


· 월면이골 - 마을과 산성우리 사이에 있는 골.


10) 하시동리(下詩洞里)

하시동리는 본래 강릉군 자가곡면 지역으로 시동의 아래쪽이 되어 하시동이라 했는데 1916년 돗골·새매기·배나무골·엄나무골·골말·진골·호장골을 합해 하시동리로 되었다. 마을 북쪽에 있는 불하산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 불하산 동쪽 낙맥에 한송정에서 공부하던 화랑들이 마셨다는 우물이 있는데 우물 옆 돌절구에 “신라선인영랑연단석구(新羅仙人永郎鍊丹石臼)"라 쓴 글이 있다. 마을 북쪽에는 강릉의 5호 가운데 하나인 뒷개와 남쪽에는 강릉의 5호 가운데 하나인 풍호가 있고, 그 남쪽에는 원장봉과 사선정·신라 초기의 석관고분군(지방기념물 제18호)·박창규 가옥(문화재자료 제91호)이 있다.

마을은 동쪽으로는 바다·대동리(옛 안인리), 서쪽으로는 상시동리, 남쪽으로는 대동리·모전리, 북쪽으로는 월호평동과 접해있다.


1리

· 배나무골(舟木谷) - 옛 시동 기차역 부근. 배고래(상시동1리) 남쪽이 된다. 이 마을에 있는 강릉 박씨의 묘가 '배를 나무에 걸어 매놓은 형국(型)'으로 되어 있어 생긴 이름이다. 또 이 마을에 배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어 배나무골(梨木洞)이라고도 한다.

 

 

 

 

 

더 많은 강릉시 강동면 관련 도서 서적+
https://kangdbang.tistory.com/1447

 

강릉시 강동면 관련 도서 서적

강릉시 강동면 관련 도서 서적 강릉, 강릉인, 강릉의 얼 (송담서원 관련 내용) https://kangdbang.tistory.com/1448 강릉시 강동면 관련 도서 서적 (강릉, 강릉인, 강릉의 얼) 강릉, 강릉인, 강릉의 얼 저자

kangdbang.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