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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밤의 약국, 김희선

강다방 2023. 7. 6. 15:18

 

 

 

 

 

에세이

밤의 약국, 김희선

 

 

해리포터에 나오는 신비한 동물사전, 약초사전 같은 책. 강원도 춘천에서 자랐고, 원주에서 약국을 하며 종종 바다 보러 강릉에 오는 것으로 추정되는 작가의 동식물(사람도 포함된다) 에세이. 전문적인 약학 용어가 나오지만, 진지하면서도 특유의 엉뚱함으로 글이 쉽고 재미있어 누구나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샘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제목 : 밤의 약국
저자 : 김희선
펴낸곳 : H (현대문학)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279쪽
크기 : 112x190mm
가격 : 16,000원
발행일 : 2023년 3월 30일
ISBN : 979-11-6790-195-8 (04810)

 

 

 

 

 

PIN 001 밤의 약국 김희선 에세이

밤이 깊다.
아직 잠들지 못한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따뜻한 시선으로 빛을 밝히는 밤의 약국 이야기
낮엔 약사 반엔 소설가, 김희선의 첫 에세이

 

 

 

 

 

역장에게 보내는 송가

예전에 원주역에는 꿩이 살았다. 그는 '꿩빈 역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선지 머리엔 작은 역장 모자 같은 걸 쓴 채 우리 안 횃대에 앉아 있곤 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 꿩은 역장 모자를 쓰고 있던 걸까? 혹시 나는 그 옆에 붙어 있던 꿩빈 역장에 대한 안내문을 읽으며 상상 속에서 모자를 쓴꿩을 만들어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단정하게 모자를 쓰고 횃대에 의젓이 앉아 있는 꿩빈 역장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화려한 목덜미와 쭉 뻗은 꼬리, "뀌엉-" 하고 길게 우는 울음소리까지).

역장의 이름이 '꿩빈'인 것은, 아마도 '빈'이라는 음을 가진 한자 중 '꿩'을 뜻하는 글자가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돌고래가 꾸는 꿈

바다 생각이 나서 동해로 향했다.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곳은 주문진항이었다.

항구엔 갈매기가 많았다.

"갈매기들이 몇 살까지 사는지 아니?"

이렇게 물으면 대부분(아마 갈매기 전문가나 조류학자가 아니라면) 10년, 20년, 혹은 30년이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갈매기는 오래 살기로 유명한 새다. 그들의 평균수명은 60세고, 운 좋은 갈매기는 70세까지도 산다는 것을 나는 예전에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내가 보고 있는 갈매기들이, 그래서 예사롭지 않았다. 저렇게 날아다 니는 갈매기 중엔 나보다 더 오래 산 '갈매기 노인'도 있을 테니까...


 

 

 


"까아까아" 우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버드 브레인』엔, 까치가 사람의 얼굴을 잘 알아본다고도 쓰여 있었다. 3년이 지나서까지도 과거에 만났던 사람을 기억한다는데, 까마귓과의 새들이 특히 그렇다는 것이다. 도대체 새들은 어떻게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 는 걸까? 우린 까치나 참새, 비둘기, 어치, 황조롱이, 이 새들 각각의 얼굴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데.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까치, 잔디밭을 걸어 다니며 뭔가를 쪼는 까치, 전봇대 위, 가로등 꼭대기, 혹은 어느 집 창틀에 앉은 까치에 이르기까지, 모두 똑같이 보일 뿐인데, 아마 3년 후 어느 날 어떤 까치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난 그 새가 똘치인지 아닌지 영원히 알 수 없겠지. 까만 깃털에 단단한 부리,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과 긴 꽁지깃. 다른 듯 똑같은 그 모습들. 그러고 보면 까치들만이 우리를 기억하고 알아보고 날갯짓하는 이 세계란 얼마나 이상한 곳 인지!

 

 

 

 

 

예전에 『기원의 소설 소설의 기원』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보았다. "소설이란 자신의 과거에 보내는 불가능한 작별 인사"라고. 나는 거기에 두어 마디를 덧붙이고 몇 마디를 뺀 다음, 이렇게 중얼거려 본다. 세상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불가능한 작별 인사"가 있다고.

만약 진정한 작별 인사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삼천 배쯤은 가벼워질 거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이루지 못한 인사들은 점점 더 쌓여만 간다.

그리고 어느 날, 난 발밑을 보고 알았어.

내가 밟고 선 땅이 바로 그 인사들의 무게라는 것을. 그 무게가 나를 지탱해주고 나는 거기에 기대어 심연 같은 지상을 날아오르며 건너가는 거지. 무거워질수록 자꾸만 가벼워지며.

 

 

 

 

 

귀뚜라미는 오직 수컷만이 노래하는데, 짝을 찾기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운다는 것을 그즈음에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귀뚜라미는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생을 누리고 늦가을과 함께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죽음과 부패는 작은 갈색 귀뚜라미에겐 전혀 두려운 게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오늘이 영원할 것처럼 한쪽 다리로 다른 쪽 다리를 문지르고 - 이게 귀뚜라미가 노래하는 방식이다 - 이 풀잎에서 저 풀잎으로 뛰어오른다.

이제 나에게 귀뚜라미는 살아 숨 쉬는 아름다운 곤충 일 뿐이다. 가을이 오는 것을 귀띔해주고 여름이 떠나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엊그제 밤, 어두운 풀밭 가장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어 다니는 귀뚜라미를 보았다.


 

 

 

반숙으로 익은 노른자를 숟가락으로 푹 떠먹으면, 그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지면서 입안에선 말할 수 없는 고소함이 퍼져나 간다.

달걀이 한 개의 세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둥글고 단단한 껍질 속 비릿하고 몽글몽글한 덩어리가 그저 하나의 커다란 세포라니. 노른자와 흰자 사이에 있는 하얗고 끈적한 알끈이 닭의 배아고, 거기서 병아리가 생겨나 자라난다. 노른자를 먹고 흰자에 둘러싸여 보호받으며, 그렇게 스무하루가 지나면 알껍질이 깨지면...

 

 

 

 

아기 돌고래는 태어나서 채 6달이 지나기 전에 자기만의 고유한 휘파람 소릴 만든다. 그들이 우리 인간처럼 입으로 소릴 내는 건 아니다. 돌고래들은 머리 위에 달린 분수공으로 공기를 뿜어내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름답고 독특한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 소리는 그대로 돌고래의 이름이 된다. 다른 돌고래들이 그를 부를 때, 그들은 바로 그 아기 돌고래만의 휘파람을 똑같이 흉내 낸다. 그러니까 만약 아기 돌고래의 휘파람이 "도미솔도미 솔라라라솔이라면, 다른 돌고래 친구들은 "도미솔도미 솔라라라솔"이라고 노래함으로써 그를 부르는 것이다. 휘파람 소리가 이름이 되는 바닷속 세계는 신비롭다. 어떤 돌고래의 이름은 "도도솔솔라솔"이고, 또 다른 돌고래의 이름은 "솔파미레도레미도솔"이며, 저기 멀리 파도를 타고 웃고 있는 돌고래는 "도레미미도미솔라솔"인 세상.

태어나서 스스로 이름을 짓는 세계 역시 기묘하다...

 

 

 

 

 

'나'는 '뇌'가 아니라 '(뇌를 포함한) 몸 전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건 순전히 나의 강아지들 덕분이다.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마토는 내게 생명의 불가역성, 그 빛나는 유일함을 일깨워줬다. 품에 안은 강 아지가 마지막 숨을 내쉬며 서서히 식어갈 때, 난 세상에서 가장 큰 질문에 맞닥뜨렸다. '살아 있다는 건 뭘까?'

그리고 칸토.

칸토와 매일 산책하면서 나는, 움직이고 걷고 뛰고 맛보고 냄새 맡고 느끼는 나 자신이 곧 '살아 있음'이라는 걸 알았다. 만약 슈퍼슈퍼컴퓨터가 있어서 거기에 나의 뇌를 온전히 업로딩한다 해도, 그게 결코 '나'일 수 없음을, 이렇게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업로딩된 내가 영원히 살며 세상의 모든 지혜와 우주의 비밀을 알게 된다 해도, 그 존재는 산책하며 나뭇잎의 냄새를 맡을 수 없고...

 

 

 

 

 


이런 깨달음을, 뇌과학자 미겔 니코렐리스는 그의 책 『뇌와 세계』에서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다.

"산다는 것은 에너지를 소산시켜 유기 물질에 정보를 새기는 과정이다."

니코렐리스 역시 산책하던 중 잘려나간 나무둥치를 보며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나무의 나이테는 나무가 살아온 모든 과정을 드러낸다. 나무의 기억, 나무의 꿈, 나무의 고통, 나무의 희열. 마찬가지로 우리 몸은 우리의 기억, 우리의 꿈, 우리의 고통, 우리의 희열을 모두 담고 있다. 모든 것은 부분이 며 전체이고, 주름, 피부, 반점, 얽히고설킨 뉴런과 머리칼의 색, 흉터, 상처, 하다못해 관절의 염증에 이르기까지 그 전체가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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