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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물, 소설] 잔디와 발자국, 이종혁

강다방 2022. 12. 12. 19:46

 

 

 

 

독립출판물, 소설

잔디와 발자국, 이종혁

 

 

안도하는 삶을 살고 싶어 탄생한 주인공 안도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7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책이다. 강다방은 카페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 내용도 재미있고 글도 술술 읽혀 그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뚝딱 헤치웠다. 읽고 나면 재미있는 단편 드라마 여러 편을 본 것 같은 소설.

 

 

제목 : 잔디와 발자국
저자 : 이종혁
펴낸곳 : 바다에 빠진 소금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144쪽
크기 : 115x185mm
가격 : 9,000원
발행일 : 2022년 5월 26일
ISBN : -

 

 

작가 이종혁

https://www.instagram.com/mist0717/

 

 

 

 

 

잔디와 발자국
grass and footprints

이종혁 단편 소설

안도야, 나 파리로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몰라. 기약 없어.
잘 지내고 있어.
안녕.

 

 

 

 

 

나는 지금 카사블랑카에 있어. 가난한 주제에 시내 중심가에 있는 오성급호텔에 묵고있어. "평소의 나라면 절대 가지 않을 비싼 호텔이지만, 온종일. 가난과 죽음을 생각하다 보니 비싼 자리에서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뭐에 홀리듯 들어오고 말았지. 저녁에는 호텔 방에서 맥주를 마셨어. 높은 창틀 위에서 춤을 췄지. 음악은 없었어 두 번 정도 떨어질 뻔했지만 두려움은 없었고 그렇다고 즐거움도 없었어. 그저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을 흔들었어. 나는 춤을 췄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몸만 흐느적거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을 거야. 이대로 떨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거 같아. 그래서 멈추지 못했어. 떨어질 때까지 춤을 췄지. 하지만 결국 나는 떨어져 축지 않았어. 죽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너한테 편지를 쓸 수 있었겠지? 역시 죽는 일은 두려운 일이더라.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섭지 않았는데 춤을 멈추고 나니 공포심이 밀려오더라고, 안도야, 나는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두렵지 않은 걸까... 여하튼 오늘도 이렇게 살아냈어.
또 편지할게. 안녕.

 

 

 

 

 

이종혁
어느 날엔가 안도하는 삶을 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안도의 이야기가 탄생했습니다.
이제 우리 안도의 삶을 살아요.

 

 

 

 

 

05 잔디와 발자국
07 1) 시와 거짓말
13 2) 잔디와 발자국
21 3) 편지

41 아가리
51 꼬꼬
79 검은 인어
97 비늘
107 지렁이
119 폐가

 

 

 

 

 


1부 시와 거짓말

그녀는 시를 좋아하냐고 물었고, 안도는 그렇다고 했다. 그녀는 어떤 시인을 좋아하냐고 물었고, 안도는 한강 작가라고 했다. 그녀는 어떤 시집 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었고, 안도는 『서랍에 저녁 을 넣어 두었다』라고 했다.

사실 안도는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호감을 얻고 싶었을 뿐. 다행히도 유일하게 한권 있던 시집이 자신을 살렸다. 소설 『채식주의 자』를 읽고 한강 작가의 작품에 푹 빠졌고, 이 작가의 다른 소설책들을 사면서 덩달아 시집도 한 권 샀다. 시에 관심은 없었지만 한강 작가의 모든 작품을 소장하고 싶었다. 그때 소유욕으로 시집을 사지 않았더라면 시를 좋아한다는 거짓말을 들켰 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 시집의 어떤 구절이...

 

 

 

 

 

어느 날 그녀는 안도에게 시집을 한 권 선물했다. 안도는 또 거짓말했다. 안 그래도 사려고 했는데 잘 됐다며. 그녀가 건넨 시집은 이제니 시인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였다. 선물이 고맙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지만 제목을 보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무슨 의미지? 우리를 말하는 건가? 별 거 아닌 책 제목 하나로 의미를 부여하다니. 안도는 자신이 쪼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녀 앞에서 시집을 펼쳤다. 첫 장에 적힌 '시인의 말부터 어려웠다. 목차를 넘겨 첫 시를 읽었다. '코끼리'라는 단어가 이렇게 어려운 말이었나? 그 쉬운 단어가 시 안에만 들어가면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시어가 되었다. 그녀 앞이라 첫 장부터 좋다고, 집에 가서 자세히 읽어봐야겠다고 말하며 어물쩍 넘어갔다. 다음에 그녀를 만날 때 뭐라도 말하려면 조금이라도 이해해야 할 텐데. 도움을 얻고자 해설을 읽었지만, 해설조차 어려웠다. 시의 영역은 불가침의 영역인 건가.

 

 

 

 

 

마음이 답답해진 안도는 시를 자주 읽는 친구에게 물었다.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고. 그는 그냥 감상하는 거라고 했다. 이해되지 않는데 어떻게 감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일단 계속 읽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시를 감상하는 일은 무언가 찾는 과정이라고 했다. 자신도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계속 읽다 보면 무언가 느껴진다고.

“똑같은 문장을 읽어도 읽는 사람마다 느껴지 는게 달라. 분명 계속 읽다 보면 너도 무언가 와닿을 거야."

그리고 그것은 자신밖에 모른다고 했다.

안도가 시집을 열 페이지쯤 읽었을 때부터 -물론 이해가 안 된 채-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몰랐다. 전화를 걸어도 문자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지난 대화와 행동을 곱씹어봤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

 

 

 

 

 


-나 한 시간 뒤에 파리로 떠나.
언제 돌아올지 몰라. 기약 없어.
잘 지내고 있어. 안녕.

그녀는 프랑스 파리로 간다는 문자 메시지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안도는 그 메시지를 한참 봤다. 기약 없다, 라, 문자는 아침 일곱 시에 왔다. 안도는 아침 여덟 시 반에 일어나 메시지를 확인했으니까 이미 시간상 비행기는 떴을 것이다. 작별 인사도 못 하고 떠나보냈지만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연인처럼 특별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단지 그녀가 영영 떠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삼 일 전,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떠난다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데.

 

 

 

 

 

나는 실제로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 얼마 안 지나서 번데기 중앙 부분이 갈라지더니 한참 꾸물꾸물 대더라고. 껍데기 안에서 나약한 날개를 가진 나비가 천천히 그리고 안간힘으로 몸을 펼치려 노력했어. 구겨진 날개에 점점 혈액이 퍼지는 것 같더니 결국 파랗고 아름다운 날개가 펼쳐졌어. 바로 날지는 못했지만, 곧 팔랑팔랑 아름다운 비행을 하며 날아가더라. 그러기까지 한 시간도 더 걸렸던 거 같아.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어. 한참을 울었어. 왜 그렇게까지 울었는지 몰라. 그냥 울 수밖에 없었어.

가이드는 그 나비 이름이 '헬레나 모르포 나비'라고 했어. 가이드가 말하길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자마자 새들에게 많이 잡아먹히기 때문에, 애벌레에서 나비로 살아갈 가능성이 1%로도 안 된대. 운이 좋은 거라고. 나비는 약한 존재에서 약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걸 지도 몰라. 오늘은 무언가 찾은 느낌이야.

약한 존재는 다시 태어나도 결국 약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어. 바뀔 수 없다면 차라리 아름답게 약하고 싶어.

- 페루에서

 

 

 

 

 

우리는 일단 어설픈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야. 얕지도 그렇다고 깊지도 않은 그런 곳. 너무 쉽지도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은 그런 곳. 그래야 시도 정도는 할 수 있어. 성공하면 용기를 얻을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이런저런 핑계를 댈 수 있지. 제대로 시작하기 전에 그냥 간 한번 본 거라고. 그렇게 첫걸음은 어설픈 것부터 시작하는 거야.

겁 많은 사람의 특권이 뭐냐면, 다른 사람한테 별거 아닌 일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용기를 얻을 수 있 다는 거야. 그 용기들이 쌓이면 또 어떤 일을 스스럼없이 다시 시도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여전히 나약한 겁쟁이지만 오늘도 무언가 시도할 것들을 찾아.


- 콜롬비아에서

 

 

 

 


"할머니. 손자분 맹장이에요. 조금만 늦었어도 터질 뻔했어요. 진작 오셨어야죠. 큰일 날 뻔했어요."

“아이고. 지송해요. 선상님. 내가 할미가 돼갖고 그것도 모르고.”

"할머니께서 뭐가 죄송하셔요. 일단 바로 수술하시죠."

할머니는 데스크에서 간호사의 설명을 들으며 수술 동의서에 사인했다. 그러고는 할아버지 의사를 욕하며 구시렁거렸다.

“망할 돌팔이 의사 같으니. 애가 다 죽어가는 것도 모름서...!”

사실 나는 돌팔이 의사보다 김민지와 김민지의 엄마가 더 미웠다.

수술실로 들어가자 겁이 났다. 의사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잠깐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거야."

마취를 하기 전, 의사는 내 바지를 살짝 들춰보 더니 간호사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간호사는 급히 수술실을 나가더니 곧 다시 돌아왔다. 마취를 시작한다는 말과 함께 코가 맵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마취에서 깨어나니 아파야 할 오른쪽 배보다 오히려 아래가 더 아팠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는 할머니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할머니. 큰일 났어. 나 꼬추가 아파."

"인났냐? 내 새끼. 괜찮여. 포경수술도 같이 해서 그래."

수술실에서 의사가 간호사에게 속삭였던 말은, 알고 보니 맹장 수술하는 김에 포경수술도 같이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할머니에게 물어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언젠가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음의 준비도 없이 하게 될 줄이야. 젠장. 친구의 삼촌이 했던 말도 거짓말이었다. 병원에는 수영장은커녕 놀이터와 PC방도 없었다.

두 번째로 죽을 뻔했던 적도 그맘때였다. 읍내 오락실에서 밤늦게까지 놀던 친구와 나는 버스 막차 시간이 다 되어서야 급하게 뛰어나왔다...

 

 

 

 

 

뭐가 됐든 일단 빨리 결정해야 한다. 혜린은 최대리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한 뒤,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을 사 회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일년간 끊었던 담배를 입에 다시 물었다. 연달아 세개비를 피운 혜린이 다 타고 남은 담배를 슥슥 비벼껐다. 이내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내쉬고서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빠. 미안한데... 나 할머니 장례식에 못 갈 거 같아."
"이틀이라도 못 빼?"
"지금 내 상황 알잖아. 진짜 중요한 거. 도저히 안 될 거 같아."
“... 어쩔 수 없지. 너무 무리하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미안해. 도착하면 연락해 줘."

혜린은 전화를 끊은 뒤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도 붙이지 못하고 촌스러운 녹색 옥상 바닥만 한참을 내려다봤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 들지 않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김 대리도 안도와 비슷한 시기에 이직한 경력직이었다. 서로 다른 팀이었지만 이번 프로젝트로 안도팀에 잠시 합류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시 각자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김 대리와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부터 옥상에서 우연히 만나 담배를 피우며 친해진 사이였다. 담배는 몸에 안 좋지 만 누군가와 금세 친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안도는 자신이 담배를 끊을 수 없는 이유가 어쩌면 외로워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나뿐인 침낭은 펼쳐서 함께 덮고 자기로 했다.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상욱 형은 텐트의 천장 을 보며 내게 말했다.

"안도야. 내가 왜 폐가를 찍는지 알아?"
"뭐 그런 거 아니야?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나 버림받고 소외당하는 것들에 대한 어떤 고찰과 비판?"
“물론 그런 의미도 있지. 그런데 꼭 그런 것들 때문에 찍는 건 아니야."
"그럼 뭔데?"
“폐가는 나랑 닮았어."

의아해진 나는 고개를 돌려 상욱 형을 봤다.

"폐가라는 게, 멀쩡한 땅 위에 곧 부서져 쓰러질 거 같은 집이 서 있는 거잖아? 아슬아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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