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불안을 쌓으며 나아간다
불안 한 톳, 이택민
갓 지은 밥 위에 바삭하고 짭짤한 김을 올려 먹은 것 같은 책. 입맛이 없을 때 김 하나면 공깃밥 한 그릇을 뚝딱하듯, 이 에세이도 뚝딱 한 권 읽기 좋다. 톳은 김을 세는 단위로 김 100장을 의미한다. 이 책은 톳처럼 100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제목도 한 장, 두 장, 세 장으로 시작해 백 장으로 끝난다. 비슷한 또래(?)가 쓴 에세이라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던 책. 연휴 끝, 출근 전날 밤 읽으면 더욱 좋다.
제목 : 불안 한 톳
저자 : 이택민
펴낸곳 : 책편사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142쪽
크기 : 120x188mm
가격 : 11,000원
발행일 : 2022년 8월 1일
ISBN : 979-11-971216-9-2 (13810)
이택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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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qkqnek219
책편사
https://www.instagram.com/chaekpyunsa/
우리는 불안을 쌓으며 나아간다
불안 한 톳, 이택민
이택민
불안을 마주하는 사람.
불안을 달래기 위해 매일 밤 쓰고, 달립니다.
성인이 되어 얼마나 많은 새벽을 지새웠습니까.
그 시간 속에서 흰 얼굴에 투명한 눈물을 흘리는
대신, 흰 종이 위에 검은 문장을 흘렸습니다.
《고민 한 두름》
《갈 데가 있어서요》
한 톳
김을 세는 단위로 김 100장을 한 통이라고 한다.
김 한 장은 얇고 그 무게도 가볍지만,
김 한 통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책을 펴내며
우리는 불안을 쌓으며 나아간다.
손에 잡힌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게 고민이라면, 손에 잡히지 않는 물을 공연히 주물럭거리는 것은 불안이다.
서른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선 지금, 불안감에 휩싸였다. 나이에 대한 불안, 진로에 대한 불안, 관계에 대한 불안. 불안은 빠르게 증식했다. 늘어난 불안이 나를 짓누를 때면, 이 불안한 마음을 재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조바심도 함께 찾아왔다. 머릿속을 잠식하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새벽에 자주 달렸다. 더우나 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렸다. 달리기 전까지는, 몸을 바깥으로 내밀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움직이기 싫었다. 하지만 귀찮은 몸을 이끌고 나와 달리고 난 후엔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 무언가를 쓰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보는 일기일지언정 감정을 끄적이고 난 뒤엔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샤워를 한 것처럼 개운했다. 뛰는 기분은 쓰는 기분과 여러모로 비슷했다.
그날 밤 잠이 잘 오는 것까지도.
어느 날, 광교 호수공원으로 이어지는 하천을 따라 뛰던 중 물길이 바뀌는 구간을 발견한 적이 있다. 유유히 흐르던 물이 어느 지점부터 급류로 바뀌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빠르게 흐르는 곳엔 유리처럼 투명한 막이 생겼다. 신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에도 불안이 내재되어 있을까. 불안한 마음 간직하고 있어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걸까.
그렇게 머릿속을 부유하는 불안한 마음을 얇게 펴 종이 위에 널어놓았다. 햇볕을 쬐고 바람에 마르는 동안 불안한 마음에도 모양이란 게 생겼다. 내가 왜 불안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던 어제와는 사뭇 기분이 달랐다. 불안의 모양이, 불안의 모습이, 불안의 원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안을 확인하기 위해,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 매일 밤 쓰고, 달렸다.
지금 이 불안한 마음도 김 한 장처럼 쉬이 날아가 버린단 걸 안다. 그래서 불안 한 통을 묶어내고 싶었다. 이리저리 치이는 가벼운 마음일지라도 그 마음이, 그 마음을 적어낸 글이 백 장 정도 쌓인다면, 한 장이 백 장이 되어 한 통이라 불리는 것처럼, 불안도 다른 말로 부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쓰는 동안 나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처럼, 읽는 이들 마음에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소풍날 든든하게 배를 채워주던 김밥처럼, 손바닥만한 크기로 후륨한 밥반찬이 되어 주는 조미김처럼, 흰쌀밥과 만나 맛있는 주먹밥이 되는 김 가루처럼 나의 글 한 장이, 나의 문장 한 줄이 당신의 허기를 달래줄 수 있기를 바란다.
《고민 한 두름》에 이어서 단위 명사를 이용해 또 한 번 책을 펴내게 되었다. 나의 세 번째 책이자, 시리즈를 알리는 두 번째 책이다. 김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한 톳처럼, 서른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적어낸 글들을 100편 수록하였다. 불안한 표정을 애써 감추려 했지만, 글 위에선 그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동안 나는 문장을 튀기고 볶고 삶으며 책을 펴냈는데, 이번엔 내 날 것의 문장을 엮어보기로 했다. 불안한 마음을 종이 위에 차곡차곡 쌓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불안을 쌓으며 나아간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책장을 덮었을 때, 불안에서 벗어나려 애쓰기보단 불안과 공생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만 같다.
2022년 여름
이택민 올림
우리는 그럴만한 이유로 글을 쓴다. 우리는 그럴만한 이유로 살아간다. 어쩔 수 없이 써 내려가야 했던 것들, 어떻게서든 감추려 했던 것들이 있다. 사랑하지 못한 이에게 사랑은 말 못 할 무언가, 사과하지 못한 이에게 미안은 말 못 할 무언가, 작별하지 못한 이에게 안녕은 말 못 할 무언가이다. 그 무언가 전하지 못해 꾹꾹 글자를 눌러쓰고 꾹꾹 숨을 참아가며 살아간다.
일곱 장
내 몸에 점이 많다. 잘난 점, 못난 점, 예쁜 점, 부족한 점, 아픈 점, 건강한 점, 멋진 점, 사랑스러운 점, 귀여운 점, 모난 점, 비겁한 점, 당당한 점, 약한 점, 강한 점, 빠른 점, 느린 점, 짙은 점, 옅은 점, 나약한 점, 강인한 점, 쓸모없는 점, 자랑스러운 점, 몹쓸 점, 특이한 점, 평범한 점..........
개중 좋은 점들을 선으로 이으면 좋은 내가 될까.
열두 장
코스 요리처럼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책이 있고, 잔치 국수처럼 후루룩 흡입하는 책이 있다. 우아한 척 코스 요리를 먹는다고 대단한 음식 아니고, 단순히 주린 배를 채워 준다고 값싼 음식 아니다. 각자 상황에 맞는 독서가 있고, 각자 책을 대하는 태도가 있다. 어느 날은 새벽에 홀로 내일을 맞이하며 위스키 한 잔과 함께 독서를 즐긴다. 어느 날엔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가벼운 독서로 출출한 속을 채운다. 평생 먹고 살아갈 음식 처럼, 독서 또한 내게 일생을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양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가끔은 나와 맞지 않는 글에 더부룩해지고, 드센 문장에 탈이 나겠지만, 평생 누군가의 생각과 경험을 탐독하고 싶다. 독서야말로 합법적인 염탐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잘 먹고 잘 소화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문장에 탈이 나지 않도록 꼭꼭 씹어 먹는 습관이 필요하다.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찾아가는 것처럼, 때론 적당한 책 편식도 필요하다.
스물여덟 장
“남만큼만 살아야지”라는 생각만 버려도 낭만 있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옷도, 신발도 착용할수록 내게 딱 들어맞는 것들이있다. 예전엔 한번 240짜리 워커를 신고 온종일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그 하루로 인해 내성 발톱이 생겼다. 내게 맞지 않은 신발을 신었다는 이유로 한동안 발톱이 제 살을 파고 들어간 것이다. 어떤 삶은 살아갈수록 내게 딱 들어맞는다. 어떤 삶은 살아낼수록 자기 목을 조이기도 한다. 우린 살아가고 있는 걸까, 살아내고 있는 걸까.
어떤 한 자세를 오래도록 유지하면 피가 잘 통하지 않는다. 원상태로 복구되었을 때, 피가 다시 통하면서 그 부위가 저리기 시작한다. 저리다는 건 본래의 성질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이고, 저리다는 건 자신에게 익숙한 자리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저리다는 건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고, 저리다는 건 감내할 만 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쉰아홉 장
수돗물 내려가는 소리.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진공청소기 돌아가는 소리. 커피 내리는 소리. 버스 카드 찍는 소리. 티브이 채널 바꾸는 리모컨 소리. 키보드 자판 소리, 우산 펼치는 소리.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 사람 아닌 사물의 소리가 좋다. 사람 손을 타서 생기는 기척이 좋다. 사람 손을 타야지만 비로소 발현되는 것들이 있다.
예순일곱 장
벽돌을 나르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음식을 배달하는 뮤지션이 있다. 꿈을 위해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일상을 보내기 위해 잠을 자는 것엔 차이가 있다. 돈이 있어 취미가 생기는 것과 취미를 위해 돈을 버는 것에 괴리가 있듯, 나 또한 그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지 않고, 그들보다 나은 삶을 영위하고 있 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예술가는 왜 가난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돈이 궁하면 더 멋진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돈이 궁해서 옹졸해지진 않을까. 돈이 많으면 마음의 여유로 인해 더 좋은 문장을 적어낼 수 있을까. 돈이 많아서 초심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이것마저 자본주의 시대에 매몰되는 생각일까. 사실 벽돌을 나르는 시인은 세상을 쌓아 올리는 중이었고, 음식을 배달하는 뮤지션은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듯 행복을 전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는 세상 속에서, 귀함과 천함을 나누고 있던 사람은 바로 나였는지도 모른다.
일흔네 장
생각이 많은 오늘, 홀로 새벽을 지새운다 생각했는데 창문을 열어보니 건너편 아파트 여기저기에 불 켜진 방이 많다. 홀로 새벽을 비추는 달이라 생각했는데, 좁은 차선에도 가로등이 즐비하다. 새벽이 완전한 어둠이 아닌 건,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내고 있는 존재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일흔아홉 장
최근 런태기 (러닝 권태기)를 겪고 있는 내게 새로운 취미가 찾아왔다. 바로 걷기다. 걷는 것만큼 달리는 것이 익숙해지고 지루해져 러닝을 하지 않고 있는 내가 걷는 게 재밌어졌다. 한평생 걸어왔음에도 걸음의 재미를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오늘은 노을빛을 가감 없이 비추는 호숫가를 걸으며 생각했다. 인간은 원초적인 동물이라고, 두 발로 걷는 행위는 인간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것이라고, 걷는 모양새 달라도, 내딛는 왼발 가져오는 오른발 달라도, 보폭 달라도, 걷는 속도 달라도, 신발 달라도, 발 크기 달라도, 걷기란 필사만큼이나 수완이 좋은 취미라고, 그래, 걷는다는 건 생각의 기저를 쓰다듬는 일이다. 느리게 걸을수록 땅을 매만지는 빈도가 높아지고, 지구의 호흡을 차분히 느낄 수 있다. 걷기란 지구 반대편 우루과이의 풀 내음을 맡을 수 있는, 지구 건너편 핀란드의 찬 바람을 뵐 수 있는 퍽 흥미로운 행위다.
여든다섯 장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점은 정수리. 최저점은 발꿈치.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이 사자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나로부터 다른 무언가로 바뀔 수 없다. 나는 정수리와 발꿈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명상할 때 신체 어느 부위에 집중하는지에 따라 에너지의 흐름이 바뀌는 것처럼, 우린 어느 가치에 집중하며 살아가는지에 따라 삶의 방향성이 바뀔 수 있다. 그것은 이미터 남짓한 공간 안에서 발현된다. 세상은 거대하지만, 위대한 것은 작은 공간에서 탄생한다.
아흔여섯 장
오늘 당신은 무얼 읽습니까. 저는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신작을 읽고 편애하는 시인의 또 다른 시집을 읽습니다. 그들의 산문집은 물론이고요. 그리고 애정하는 사람들이 업로드한 블로그 포스트와 인스타그램의 게시글을 읽습니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감정을 헤아려보겠다는 뜻이고, 헤아려보겠다는 건 단순히 눈으로 읽는다는 행위보다 몇 배고 몇십 배고 감정을 소모하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의 책을 읽고 좋고 나쁨에 대해 피드백을 남기거나, 누군가의 글을 읽고 쉽게 지나치지 못해 댓글을 남긴다는 건 그만큼의 감정을 소모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악플을 남기는 사람 들처럼 몰상식한 인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습니다. 관심이 없다면 관심을 쏟을 시간조차 할애하지 않습니다. 제가 읽고 반응하는 것들은 제가 흥미를 느끼는 것들입 니다. 당신은 지금 무얼 읽고 무엇에 반응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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