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다방 이야기공장/입점 도서 소개

[독립출판물, 사회/정치] 제로의 책, 강현석 등 12명

강다방 2022. 9. 19. 15:31

 

 

 

 

제로의 책


출판업계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쯤은 읽어봤으면 하는 책. 제로의 책은 버려지는 종이를 최소화하는 크기로 제작되었으며, 표지 대신 목차를 표지로 대신하였다. 이렇게도 책을 만들 수 있구나 새로운 시선으로 책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표지부터 제본, 내용까지 신경을 참 많이 쓴 책.

 


제목 : 제로의책
저자 : 강현석, 고아침, 김영옥, 손희정, 송수연, 안팎, 어라우드랩, 윤상은, 채효정, 최명애, 최승준, 헤더 데이비스
펴낸곳 : 돛과닻
제본 형식 : 종이책 - 노출사철제본
쪽수 : 257쪽
크기 : 130x250mm
가격 : 24,000원
발행일 : 2022년 4월 8일
ISBN : 979-11-968501-7-3 (03300)

 

 

돛과 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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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글이 2018년부터 진행한 돌 이미지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돌 이미지 중에서도 특히 돌을 다룬 예술작품에 관해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돌 이미지를 수집하는 화자의 목소리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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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2 제로의 책, 여는 글
6 제로를 위한 디자인 잡담, 어라우드랩
26 메타버그 세계관, 최승준
48 재야생화: 인류세의 미래를 위한 대담한 상상, 최명에
66 부모 예술가를 배제하지 않는 방법 부록1
70 모든 몸을 위한 발레, 윤상은
81 창살과 영혼, 손희정
101 셀카의 기술, 고아침
110 구축 없는 건축의 구축, 강현석
132 집과 숲, 김영주 인터뷰
156 필패하는 말과 토대 없는 믿음, 안팎
174 어떤 것도 버리지 않기 위한 조각들 부록2
170 이것은 상상력의 싸움이다, 채효정
206 데이터셋 그리고 팅커링, 송수연
223 퀴어 자손, 헤더 데이비스
235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김영옥

250 함께한 사람들
255 만든 사람들
257 도판 출처

돛과닻

 

 

 

 

 

 


B. 팔구 년 정도 됐나? J가 디자이너로서 지구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 J는 잘 살고 있을까.

S. 사실 난 J의 생각에 동의해, 그렇지만 계속 해보고 싶기도 해. 대학 다닐 때 한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어. 산을 정말 좋아하는데 건축은 산을 깎아내는 일인 것 같다고. 그떄 나는 "그래도 산을 좋아하는 네가 건축을 해서 다행이야."라고 말했어. 그 말을 이제 나를 향해 돌려놓고 합리화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B. 나는 그런 고민을 하는 디자이너들이 그만두지 않고, 여러가지 디자인을 시도하면 좋겠어. 디자인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어. 환경을 고려하는 디자이너들의 시도가 많아지면 사회도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S. 맞아. 우리는 그런 시도로 물리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고 했지.

B. 응.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재료 중 하나인 종이로 제작을 할 때도 종이가 덜 버려지는 방법을 고민하고, 인쇄할 때는 유해 물질이 적은 잉크를 사용하고, 불필요한 가공을 줄이도록 노력했잖아. 때로는 화려한 후가공이나 다양한 판형을 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정말 필요한 부분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마음을 다잡았어.

S. 여전히 유혹에 흔들리고 지난 선택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해. 난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기업에 비하면 그 양이나 규모가 너무나 소박한데...

 

 

 

 

 

 


생각보다 환경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알게 돼서 계속 노력할 수 있는 것 같아. '종이 한 장 차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고 우리가 자주 말했던 것처럼, 작은 것도 그 영향은 작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

B. 환경적인 이유로 무엇이 무엇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플라스틱 쓰레기가 큰 문제가 되니까 기업에서는 너도나도 플라스틱을 종이로 대체하고 있잖아. 일회용 용기나 상품의 포장 상자들 말야.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종이의 사용량을 줄인다면서 고지서나 출판물을 전자고지서나 온라인 출판으로 전환하기도 하고.

3. 이 책 1,000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 가정용 냉장고 14.1대의 연간 소비량과 동일한 에너지, 가정용 세탁기 10.8대의 연간 소비량과 동일한 물을 소비했다. 또한 자동차 0.5대의 연간 배출량과 동일한 탄소를 배출했다. 재생펄프만을 사용한 종이이므로 새롭게 나무를 베지는 않았다. 만약 재생종이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18.4그루의 나무를 베고, 가정용 냉장고 23.3대의 연간 에너지 소비량, 가정용 세탁기 11.9대의 연간 물 소비량을 사용하고, 자동차 1.3대의 연간 탄소 배출량과 동일한 탄소를 배출했을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값은 미국 기준으로, Environmental Paper Network의 Paper Calculator를 통해 얻었다. (environmentalpaper.org)

11 제로를 위한 디자인 잡담

 

 

 

 

 


무엇을 무엇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쉬운 선택이야. 하지만 단순히 소재나 매체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종이의 원료는 숲이고, 종이 생산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해. 그리고 온라인의 데이터 보관을 위한 데이터 센터의 사용으로 어마어마한 탄소가 배출된다고 하잖아.

S. 그렇지만 어떤 소재가 더 나은 선택일까 하는 고민은 유효하지 않아?

B. 당연하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1959년에 스웨덴에서 비닐봉지가 발명된 이유가 일회용 종이봉투가 숲을 훼손한다는 거였잖아. 비닐봉지는 종이봉투보다 튼튼해서 여러 번 사용해도 잘 찢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우리는 비닐봉지를 일회용으로 사용하게 됐어. 소비의 형태를 바꾸지 않고 소재만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거지.

S.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됐네.

B. 요즘 이야기하는 친환경 신소재도 마찬가지 아닐까?

S. 그렇지. 신소재의 경우에는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어. PLA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폐기를 목적으로 하는 생분해플라스틱이 재활용성이...

4. Poly Lactic Acid, 생분해플라스틱의 일종.
5. 생분해성 플라스틱과 바이오 기반 플라스틱이 항상 쉽게 분해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자외선 또는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에 노출되어야 하며, 일부 조건에서는 분해하는 데 여전히 수 년이 걸릴 수 있다. 『플라스틱 이슈리포트』, 녹색연합, 2020, 1-11쪽.

 

 

 

 

 

비교적 용이한 PET나 PP같은 플라스틱보다 더 나은 선택일까 하는 의심마저 들어. 환경적 영향의 일부만을 내세워 일회용으로 사용해도 괜찮다고 홍보하는 데 대한 불편함일지도 모르겠어.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의 심각성이 희석되는 느낌이랄까.

B. 그래서 소비의 형태를 바꾸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S. 전적으로 동의해. 하지만 소재의 선택도 가볍게 여길 순 없어. 비교적 쉽게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빨리 변화할 수 있다는 거잖아.

B. 그건 그래. 넌 소재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어?

S. 나름의 기준이 있어. 이미 재활용되었고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 재활용과 분해가 쉬운 소재, 재활용이 쉬운 소재, 분해가 쉬운 소재 순이야.

B. 나는 분해가 쉬운 자연 소재를 재활용이 가능한 소재보다 우선 기준으로 생각해. 우리 안에서도 조금 다른 게 재미있다. 그리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순환이야. 디자인 결과물이 사망할 때, 그러니까 쓰임을 다하고 죽음을 맞이할 때, 지구에 너무 오래 남아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연적으로 분해되거나 지속해서 재활용될 수 있어야 해. 페트병 몇십 개를 재활용해서 만든 옷이라도 다시 재활용될 수 없다면, 재활용의 순환고리를 끊는 것인데, 그게 더 좋은 선택일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데 그런 것들을 모두가 하나하나 다 알아보고 선택하는 건 너무 어렵잖아. 사회적으로 합의된 기준은 존재할까?

제로를 위한 디자인 잡담

 

 

 

 

 

 


B. 앞뒤에 물리적으로 내지를 보호하는 두꺼운 종이가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그 자리에 있어 대신에 글의 속 내용을 알 수 있는 목차와 판권 등의 서지정보를 바로 드러내명 어떨까. 제목이 없는 책.

S. 그리고 책이 엮인 모습이 보이도록 누드사철제본을 해도 좋겠따. 사철제본도 원래는 두꺼운 겉종이로 감싸 견고하게 만드는 양장제본을 위한 제본 방법이니까.

B. 간지를 위한 페이지도 넣지 말자. 물론 빈 페이지가 글의 호흡을 조절하는 장치일 수 있지만, 이 책에서는 최소한의 공간만 남기자. 호흡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S. 종이는 선택의 폭이 좁더라도 고지율 100퍼센트의 재생종이에서 찾아보면 좋을 것 같아.

B. 그리고 지난번 기획 회의에서 누군가 한 질문이 쾅하고 머리를 때렸어. 종이는 원래 흰색이냐고 물었잖아.

S. 나도 사실 아차 했어.

B. 이번에 다시 제로에 대해 생각하면서 또 당연하게 흰색을 떠올렸는데, 종이는 원래 흰색이 아니잖아. 그건 종이 본연의 색을 감추고 하얗게 표백해서 만들어낸 색일 뿐. 그래서 먼저 종이에서 제로에 가까운 색을 찾아야 할 것 같아.

S. 그렇긴 한데 재생종이의 경우에는 '본연'이라는 개념도 달라져. 재활용 섬유의 대부분이 이미...

 

 

 

 

 

 


‘문제를 인식하고 정의하는 능력'이 인재의 조건으로 회자되는 이유이기도 하죠. 스타트업의 입장에선 시스템의 틈바구니에 미해결로 남아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니 오히려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 반가울 수도 있습니다.

문제를 반가워하는 사람들, 문제를 해결하며, 새로운 문제를 창출하는 사람들이 어떤 인식을 가지면 바람직할까요? 문득 진보進步라는 한자가 '나아가는 발걸음'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생각이 납니다. 두 발로 걸을 때 한 발을 허공에 내밀려면 나머지 한 발로 땅을 단단하게 디디고 있어야 합니다. 내딛은 발이 땅을 밟고 안전하게 몸의 무게 중심이 이동한 후, 뒤에 있던 발을 앞으로 당겨서 다시 내딛습니다. 그렇게 두 발이 번갈아가며 역할을 바꿔야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 몸에 두 다리가 있는 경우 뒤에 있던 발을 당겨 제 차례를 주지 않고서야 몸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인식을 나아가는 차례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면 좋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두 발이 한 몸이 아니라면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다음의 제안을 해봅니다.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를 다룰 땐, . 어떤 하나의 방법이 보편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과대 광고를 하기보단, 특수한 상황에서 제한적으로라도 작동하는 용례를 다양하게 탐색해보며 작은 성공 사례를 축적합니다. 다양하게 탐색하고 다양하게 시도해 보는 과정에서 오차나 오류가 생기는 것도 인정하고, 그 오차를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다음...

 

 

 

 

 

 

존중과 이해가 기본이 됩니다. 활동가로서 혼자 출퇴근하고 농사 짓고 트래킹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저는 주로 혼자 기획하고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불가능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잘나서 1인 활동가를 한 것이 아니라 그런 관계나 지역 네트워킹이 잘 되어있어서 혼자 활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돌아와서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술은 삶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기술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혼자 내 삶을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주변 공동체의 도움이 있어서 그런 기술과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삶 속에서 그 과정이 계속 형성될 수 있도록 제 태도를 바꾸었고, 지금 하는 문화도시 사업 또한 그런 의미에서 제가 배운 것들을 적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활동들도 다양하게 변해왔습니다. 그러한 변화에 대해 단정적으로 원인과 결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몸으로 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건축 같은 것은 힘들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재미있던 것은 온갖 인간 군상을 다 만났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생태에 관심 있는 친구들이 모인다고 해도 관계가 안 좋아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다 풀립니다. 그때 에너지가 좋아지면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고, 에너지가 멈추면 돌아가기도 하고요.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실제로 접촉하고...

153 집과 숲

 

 

 

 

 


... 빠져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로
감염이나 환경에 대한 이야기들도 규모와 실천에 있어서 인식이 다양해질 필요가 있으 것 같습니다. 꼭 하고 싶은 질문을 하나만 더 드려보면, 전에 쓰신 글에서 '일'보다 '생활'이 중요하다고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 제로의 예술이 처음 기획할 때 했던 생각과도 교차하는 지점이 있는 듯합니다. 문화예술 안에서 무언가를 남기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탐구해보려는 노력을 하고자 했는데요. 생활이 더 중요하다고 하신 것은 어떤 뜻이었나요?

영주
제로의 예술이 전시의 계획 단계부터 전시 후의 재활용까지 고민하는 것을 관심 있게 보았습니다. 저는 제로를 0이 아니라 가득 찬 의미의 제로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생활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에는 목적이 없습니다. 일에서는 무언가 끝이 있고 승자와 패자가 있는데, 생활은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생활로 돌아오면 많은 것의 본질이 드러나고 훨씬 치열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어있는 것은 채워져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닐까요.

 

 

 

 


SK는 기후위기 시대 정유기업의 책임을 다하겠다며 ‘탄소중립 휘발유'를 출시했다. 현실은 영화보다 더 블랙 코미디다.

'탄소중립 휘발유'의 유사품으로 '탄소중립 항공권'이란 것도 있다. 탄소중립 항공권은 승객의 비행 구간에서 배출되는 1인당 탄소량을 계산하여 탄소배출권으로 환산한 가격을 티켓에 계산하여 탄소배출권으로 환산한 가격을 티켓어 얹어서 판매하는 것이다. 항공사는 당신이 내뿜는 온실가스만큼 우리가 배출권을 구입해서 상쇄시켜줄테니 온실가스 부담은 내려놓고 맘껏 비행기 여행을 하라고 부추긴다. 이런 탄소중립 상품은, 소비자들이 비행기도 계속 타고 자동차도 계속 타면서 마치 자기가 낸 돈이 온실가스를 들이마셔주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소비자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도 속아주는 것이기도 하다. 너무 깊이 파면 복잡하고 불편해지니까,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다. 내가 낸 돈은 어디선가 탄소를 흡수할 나무를 심는 데 쓰일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전문가들이 여기에 논리와 데이터를 덧붙여주면 '삽질'은 공신력을 얻는다. 항공업계가 탄소중립을 결의한 진짜 목적은 정부가 비행기의 탄소배출에 매기는 환경세를 유보시키는 데 있다. 오늘날 기업들은 연료를 '탈탄소 연료'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하거나 '계획'을 내놓는 것만으로도, 산업 전환에 공적 자금을 투자하라고 요구할 명분을 얻는다. 공익성을 내세우며 기술 개발비는 공적 자원으로 조달하고, 그렇게 개발된 상품을 '비싼 친환경 상품'으로 출시한다. 신자유주의...

 

 

 

 

 

 


기업들이 비용은 사회화하고 이익은 사유화해온 저형적인 수법, ‘사회적 약탈'의 방식이다. 시민단체나 전문가들이 이런 식의 기술적·시장적 대안을 지지하는 것은, 결국 알면서 속아주는 것이고 사기극의 공모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기업들이 사용 전력을 100퍼센트 재생에너지로 바꾸겠다고 하는 RE100 캠페인은 대표적 사례다. RE100에 참여하는 기업에는 글로벌 자본의 이름들이 빼곡하다. 애플은 선도적으로 RE100을 선언한 기업이지만, 아이폰을 만드는 폭스콘 공장은 기술적 노동 착취로 악명이 높다. 생산라인의 전기가 모두 재생에너지로 공급된다고 해도, 그 전기가 엄청난 속도로 시간당 생산량을 채근하고,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노동자들이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강도 높은 노동착취에 쓰인다면, 그걸 ‘착한 전기'고 ‘착한 기업'이라 할 수 있을까? 기업이 ESG 인증을 받고 RE100 전기를 조달하기 위해 숲과 농지가 마구 훼손되기도 한다. 에너지의 생태적 전환은 에너지원의 탈탄소화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정의롭고 평등하며 민주적인 에너지’로의 전환이라는 정치적 상상력이 반드시 결합되어야만 한다.

기후위기를 탄소 문제로 환원하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탄소배출 책임 집단에게 더 유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탄소량만 가지고 계산하는 '탄소중립’은 기업을 규제하고 책임을 묻는 대신, 탄소중립만 실현하면 '좋은 기업'으로 손쉽게 둔갑시킨다. 배출량과 흡수량을 더하고 감하여...

이것은 상상력의 싸움이다

 

 

 

 

 


제로로 만든다는 셈법은 지금까지 탄소를 배출했던 기업의 책임을 앞으로 탄소를 흡수하겠다는 기업의 약속으로 상쇄한다. 탄소 배출자에서 흡수자로의 전환은, 가해자를 해결자로 만들어버리는 셈법이다. 그렇게 해서 '탄소중립'은 기업이 구세주가 된다. 지금 기업들이 누구보다 앞장서서 열심히 탄소중립 캠페인을 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탈탄소'를 '탄소중립'으로만 바꾸어도 기업은 숨통이 트인다. '배출'이라는 상쇄 수단이 생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탄소중립에서 절대적으로 것은 자본과 기술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북반구의 국가와 기업들이다. '어디서 얼마를 줄이고 늘리느냐'라는 문제로 에너지 전환의 경로가 축소되면, 결국 할당량과 목표치를 만들고 실행할 수 있는 이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다. 하지만 '탄소 배출 몇 퍼센트 감축'처럼 숫자로 환원된 목표는, 그 숫자가 달성될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현실 감각을 쉽게 지워버린다. 전문가들이 농업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몇 퍼센트 감축해야 한다는 목표량을 정하면, 농업 현장에서는 논물을 얕게 대거나, 저탄소 비료로 바꾸거나, 스마트 팜으로 전환해야 하는 당장의 압박이 닥친다. 이것은 농민들에게는 대가 없는 새로운 노동강도와 투입비용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탈석탄'에서는 석탄만 아니라 석탄노동자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탈석탄 지역의 노동자와 주민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숫자'는 알려주지 않는다.

숫자는 많은 것을 속일 수 있다.

 

 

 

 

 

기후위기 당사국 총회에서는, 국가별 탄소감축 목표 NDC를 제출하면서 각국 정부가 자기 나라와 기업에 유리한 방식으로, 배출량을 최소치로, 흡수량을 최대치로 계산한 꼼수가 넘쳐났따. 이후 이행과 점검에서도 숫자의 속임수가 난무한다. 교육부에서 전임교원 비율을 늘리도로 요구하며 그 비율을 대학평가에 반영했을 때, 대학은 더 많은 강사들을 전임으로 임용하는 대신 강사들을 자라서 전임교원 '비율'을 높였다. 기업들이 평가에 유리하도록, 정규직 비율을 높이거나 재생에너지 비율을 높일 때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을 해고하거나, 평가에 불리한 생산라인은 하청으로 돌리면 되는데, 과연 기업들이 지금까지와 반대로 행동할까?

그런 점에서 기업을 선도해서 갱생시키겠다는 시민 캠페인은 실효적인 강제력을 갖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탄소배출 감축의 기업 책임을 다른 곳에 전가하고 분산시킨다. 그러면 캠페인이 문제라는 말을 것인가? 아니다. 캠페인도 효과적인 시민행동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자본의 상상력이 제공하는 울타리에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을 가두고, '소비 실천’ 같은 아주 협소한 경로로 우리를 동원하고 도구화하는 '기업의 캠페이너'가 되지 말자는 것이다. 얼마 전, 청년들이 기업의 그린워싱 사례를 찾아내어 거짓말을 폭로하는 캠페인을 하는 것을 보았다. 캠페인을 하려면 그런 캠페인을 해야 하다.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세요”와 같은 자기 다짐과 환경주의 계몽운동이 아니라, 저 청년들처럼 기업의 '삽질'을 폭로하는 캠페인을 하는 것이 훨씬 낫다.


185 이것은 상상력의 싸움이다.

 

 

 

 

 


구조 속에서, 각자의 삶에서 녹색전환을 실천하려느 시민들도 종종 모순에 부딪친다. 채식주의자들에게 단백질을 공급하는 대두나 아몬드, 아보카도도 글로벌 푸드 시스템 하에서는 '평화로운 식품'이 될 수 없다. 고기의 대체식품으로 선택하는 새우나 복제육도 자연을 파괴한다. 결국 자동차 연료는 인간과 동물의 에너지원이든, 근본적 문제 해결책은 연료의 대체가 아니라 생산 양식과 생산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에너지 전환을 위해 필수적인 광물자원은 대부분 유럽이 아니라 서구 밖의 주변부에 매장되어 있다. 희귀광물을 '프로메테우스의 금속’에 비유한 기욤 피트롱 Guillaume Pitron은 모든 하이테크 기술의 시작점은 ‘갱도'라고 말한다. 나는 기후정의에 대한 강의를 할 때 가끔 그 ‘갱도’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폐광 사진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그 엄청난 규모에 깜짝 놀란다. 탄광은 그냥 '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 봤을 때 놀랐다. 그 모습은 마치 남김없이 파먹힌 후에 메워지지도 않은 채로 버려진 거대한 몸을 보는 것 같다. 똬리를 틀며 파들어간 광산은 크고 높은 산이 거기에 거꾸로 처박혀있다 뽑혀져 나온 것 같은 형상이다. 이 공간 속에 매장되어 있던 금속의 양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걸 캐내기 위해 이만큼의 땅이 사라졌고, 그 위에 살고 있던 이들이 삶터를 잃었다. 다음에는 폐광이 되기 전, 광산 채굴이...

5. 기욤 피트롱, 『프로메테우스의 금속 - 희귀금속은 어떻게 세계를 재편하는가』,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21.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을 외부자의 관점으로 이동시킨다. 그 시점은 우리 집이 불타고 있는데도 자신을 밖에서 불구경하는 구경꾼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때로 카메라는 현장 속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기도 한다. 그래도 문제는 나타난다. 하늘 위에서 보는 대신 더 아래로 내려가서 보면 세상이 분명 좀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내 우리는 여전히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을 마주한다.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북극곰의 멍한 눈빛을 당신은 난민 보트 위의 사람들에게서 보지 않았나? 벌건 불길을 피해 강물을 따라 피신하는 아마존의 원주민들의 모습에는 포탄이 떨어진 전쟁터에서 도망가던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사람들의 얼굴이 그대로 겹쳐지지 않는가. 지난 반세기 동안 AP나 로이터가 전해준 타인의 고통, 우리가 경악하면서도 안도하고, 분노하면서도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그 '타인의 고통'을 극적으로 클로즈업한 장면들 말이다. 카메라를 든 사람과 찍히는 사람의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진실을 생산하는 방식은 바뀌지 않는다.

수전 손택 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이 전시적으로 소비되지 않도록 저널리즘에 ‘재현의 윤리'를 요청했지만, 중심부의 언론에 주변부의 비극은 손쉽게 포르노적으로 재현되어왔고, 오늘날은 특히 더하다. 전쟁 포르노, 기아 포르노, 난민 포르노에 이어 기후위기의 재현도 점점 포르노를 닮아간다.

 

 

 

 

 


1판 1쇄 발행 2022년 4월 8일

펴낸곳. 돛과닻
등록. 제2019-000091호
연락처. sailandanchor.info@gmail.com 
웹사이트. sailandanchor.net
인스타그램. @sailandanchor

판형. 130×250mm
표지종이, 보루지 350g (고지율 100퍼센트)
내지종이. 센토 100g (고지율 100퍼센트)

이 책은 4X6전지의 24절 사이즈로, 버려지는 종이를 최소화했습니다. 표지와 내지는 재생펄프 함유율이 100퍼센트인 종이에 콩기름잉크로 인쇄했고, 실로 꿰매는 노출사철제본 방식으로 엮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편히 읽을 수 있도록 본문의 크기를 키워 을유1945 서체를 사용하고, 본문보다 작은 글씨는 유니버셜디자인이 적용된 한국장애인개발원의 KoddiUD 온고딕 서체를 사용했습니다.

수록된 도판 중 저작권이 유효한 것은 모두 이용허락을 받았습니다. 일부 작품은 SACK를 통해 ADAGP와 저작권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각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이 책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공예술사업의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ISBN 979-11-968501-7-3
값 2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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