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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물, 소설] 모나미 연대기 153, 김영글

강다방 2022. 8. 27. 14:47

 

 

 

 

 

소설
모나미 153 연대기


모나미 153과 관련된 진실 혹은 거짓이 담긴 이야기. 모나미 볼펜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이야기부터 모나미 볼펜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라 어디부터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모르겠다. 디자인적으로도 신경을 많이 썼는데, 일반 책과 달리 검은색이 아닌 빨간색과 파란색 2도 색으로 구성되어있다. 책 옆면 또한 모나미 볼펜과 비슷한 모양으로 디자인되었고, 책 구매시 모나미 파란색 볼펜도 증정한다. 페이지수가 153쪽인건 소름이다.


제목 : 모나미 153 연대기
저자 : 김영글
펴낸곳 : 돛과닻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153쪽
크기 : 119x148mm
가격 : 12,000원
발행일 : 2019년 11월 14일
ISBN : 979-11-968501-0-4 (90810)

 

 

 

작가 김영글

https://www.instagram.com/youngle.keem/

 

출판사 돛과닻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sailandanchor/

 

 

 

 

 

 

볼펜을 돌리며

- 2009년

나는 사물에 대해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긴 수다가 끝나고 나면 그것이 전혀 사물에 대한 얘기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사물은 결코 사물로서 온전히 머무르는 법이 없다.

<모나미 153 연대기>는 모나미 볼펜에 관해 수집한 여러 가지 정 보에 픽션을 뒤섞어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사실에 기반한 허구이기도 하고 허구가 불러낸 사실이기도 한 것이다. 정보 유통이 투명하지 않았던 1960~80년대 권위주의 시대의 축적된 이야기는 1990년대에 중등교육을 받은 나와 같은 세대에게는 영원히 되풀이되는 일종의 구전동화일 수 있다. 그 속에서 발견되는 일련의 이미지들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 이 식으로 모나미 볼펜과 만난다. 그 결과, 과장과 생략과 인용과 거짓말로 구성된 너스레의 조각들을 이루었다.

이야기라는 것이 어차피 허구성을 띠는 것이라면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는 우리의 역할도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신중한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뻔뻔한 편집자로서 텍스트와 이미지를 다룬다. 결국 작업의 한 축을 이루면서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니는 것은, 쓴다는 행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김찬귀 씨는 모든 것이 과거가 될 뿐이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역사적 약자에게 최후의 무기는 기억이라는 사실을.

1964년 3월 26일 김찬귀 씨는 왕자화학공업사의 문을 닫았다.

밤하늘은 이름 없는 별로 가득했다.

그리하여, 왕자볼펜의 짧은 생애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국내 최초 볼펜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만 했다. 모나미 153 볼펜의 기나긴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모나미

1963년 3월 29일.

광신화학공업사 내부에서는 곧 출시할 볼펜을 위한 이름 공모전이 열리고 있었다. 김치수 대리는 학창 시절 갈고닦은 프랑스어 능력을 발휘할 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그가 제안한 이름은, ‘모나미’였다.

Mon(몽, 나의) + Ami(아미, 친구) = 모나미

 

 

 

 

 


길이가 길어지는 경우는 주로 볼펜에 외적인 충격이 직접적 으로 가해질 때다. 볼펜 끝을 습관적으로 테이블 모서리에 콕콕 찍을 때는 1.5밀리미터씩 길어진다. 실수로 땅에 떨어트렸을 때는 무려 16밀리미터가량 늘어났다 줄어드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우리로서는 감지하지도 못할 만큼, 아주 짧은 순간 동안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불완전한 볼펜의 길이가 정확히 153 밀리미터가 되는 순간이 있다. 한 자루의 볼펜이 목숨을 다하는 순간이다. 즉 볼펜 잉크가 다 소진되었을 때, 내부에 조금의 잉크 찌꺼기도 없이 성실하고 말끔하게 비워졌을 때다. 볼펜의 비쩍 마른 자루는 스스로 그 내용 없는 죽음의 냄새를 소리 없이 삼킨다. 보이지 않는 손 때와 먼지와 온갖 소문들을 꼬리처럼 매달고서 말이다. 우주는 볼펜을 사방에서 잡아당기고 만진다. 그리하여 눈에 너무 띄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는 변화, 딱 8밀리미터 만큼의 군더더기가 붙은 채로 볼펜의 활동은 끝난다.

153 밀리미터일 때 볼펜은 가장 덜 볼펜적이다. 힐끗 바라보면 마치 가난한 사내를 덮은 하얀 수의 조각처럼 보일 정도로.

 

 

 

 

 

 

[볼펜똥]

볼펜똥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누구일까? 어떤 생각을 하면서 그 단어를 입에 올렸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다지 유쾌한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볼펜이 똥을 싸다니, 어린아이의 관점에서라면 충분히 재미있고 귀엽기까지 한 발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사랑스러운 상상 속에서 볼펜을 의인화 해보려는 시도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그가 처한 상황은 자기도 모르게 외마디 욕설을 내뱉을 만한, 아니면 적어도 책상을 주먹으로 탕! 내리칠 만한, 상당히 짜증스러운 상황이었 음에 틀림없다.

이미 설명했듯이 볼펜은 펜 끝에 장착된 조그마한 금속 볼이 종이와의 마찰에 의해 회전하도록 만들어졌다. 종이 표면에 닿은 볼이 회전을 시작하면, 직경 1센티미터 공간에서 작은 마술이 펼쳐진다. 볼펜심 안에 들어 있는 잉크가 조금씩 끌려 나오고, 이것이 종이 위에 묻으면서 글씨가 써지는 것이다. 연필처럼 흑연심이 드러나도록 끝을 깎은 것도, 잉크병에 담가 잉크를 묻힌 것도 아니고, 그냥 종이에 대고 그었을 뿐인데 글씨가 써지다니. 볼펜의 원리를 처음 체험해 본 이들은 누구나 신기해했을 것이다. 송삼석 씨가 그랬듯이.

하지만 문명의 이기가 제공하는 편리에는 언제나 또 다른 불편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모나미 153 볼펜도 그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볼이 회전하면서 흘러나온 잉크 중 일부는 그 끈적끈적함 때문에 종이에 묻지 않고 볼에 달라붙어...

 

 

 

 

 

그는 감격에 잠겨 생각한다.
예술의 지고한 경지, 조각의 진정한 의미.
재료를 지배하지 않고 재료와 대화하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이제 그는 더 이상 벽지 화가가 아니다.
그는 볼펜똥 화가다.

[앞뚜껑]


색깔에 관해 얘기할 차례다. 모나미 153 볼펜은 오랫동안 흰 몸통에 까만 앞뚜껑의 조합으로 우리 눈에 친숙해졌다. 대중화되면서 빨강색, 파랑색이 추가되어 삼색 기본 세트가 되었지만, 사람들이 모나미 153 볼펜에 관해 말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언제나 까만 색과 흰 색의 조합이다.

모나미 153 볼펜이 한국에서 국민볼펜으로 자리 잡은 데에 정말로 그 명징한 색상 이미지의 역할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 문화인류학자는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의 직관적인 조합이 아니었더라면 유관순 누나가 이토록 오래 역사적 이미지로 기억될 수는 없었을 거라며 논란을 일축했다. 모나미 153 볼펜 역시, 백의민족의 단순한 무의식을 사로 잡아 누구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즐겨 쓰는 애용품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볼펜의 친구인 크레파스는 세상의 변화를 거스르지 못했 다.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는 크레파스의 특정 색을 '살색'이...

 

 

 

 

 

 

진보와 끼인각

1970년, 모나미 153 볼펜은 새마을운동의 미덕이 되었다.

모나미 153 볼펜의 하얀 몸통으로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대상을 '좀 더 길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탁월했다.

어머니들은 아이의 몽당연필 뒤에 모나미 153을 꽂아주었다. 아버지들도 모나미 153을 애용했다. 때로는 구두 주걱으로, 때로는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훔친 아들의 손바닥을 때리는 회초리로,

그 시절에는 땅을 더 깊이 파고, 펜스를 더 길게 잇고, 길을 더 매끈하게 연결하고, 다 쓴 속옷을 잘라 헝겊을 최대한 조각조각 이어 붙이는 것이 미덕이었다.

70년대 말의 볼펜은 자신의 기능에 집중하기보다는 본연의 기능을 소거함으로써 대상의 기능을 확장시키는 쪽에 능력을 발휘했다.

 

 

 

 

 


칼과 펜

말이 나왔으니 짚고 넘어가자면, 소설가의 육필 원고에 대해서는 1978년의 조세희 작가를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다.

“내가 취재했던 어느 철거민의 집을 찾았을 때였습니다. 마침 식사 때가 되어서 그분들이 끓여서 내온 국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데, 쿵 하고 철퇴가 내려쳐지는 거예요. 그때 가슴이 얼마나 뛰었었는지 말할 수도 없지요. 그 때는 여러분도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투사가 아니라도 나가서 멱살을 잡고 싸우게 될 겁니다. 그 와중에 저도 할 수 없이 동네 사람의 일부가 되어서 함께 철거반원들에 맞서서 싸웠지요.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내가 다니던 잡지사 부근의 문방구에 들러 모나미 볼펜 한 자루와 작은 노트 한 권을 샀습니다. 그것이 내가 쓴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시작이었습니다.”

볼펜 한 자루로 시작했지만 이 소설은 30년에 걸쳐 백만 부 이상 출판되었고 유명한 학생 필독도서가 되었다. 그런데 세 차례 강산이 바뀌고 백만 명의 독자가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존재했다. 작가 스스로도 전혀 짐작하지 못 했던 사실인데, 난쟁이가 그 후 도무지 늙지를 않는다는 사실...

 

 

 

 


연습장의 표면은 볼펜 구멍을 통해 흘러나온 끈적한 잉크가 그려놓은 흔적으로 지저분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저분해지면 지저분해질수록 순수한 無의 상태로 환원되는 것이 깜지의 법칙이다. 이 법칙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볼펜이다. 볼펜 그 자체라기보다, 잉크가 닳으면 무한 리필을 하게 되는 볼펜의 지속성이다.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글씨체를 완성하기까지 칠십 평생 벼루 열 개를 구멍 냈고, 붓 1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미치광이 초서'로도 불린 당나라 회소는 몽당붓이 산더미를 이루면 무덤을 만들어주고 3일간 애도했다고 한다. 이 도저한 필기구에의 탐닉은 21세기의 젊은이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수능을 앞둔 수험생이나 고시생들은 볼펜을 1백 자루씩 사다 놓고 공부하면서 몇 자루나 썼는지를 기록한다. 심이 다할 때 까지 쓰고 나서 쓰레기통에 버릴 때의 그 희열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 집중력보다 호기심이 빨리 계발된 학생들의 경우에는 사용 중간중간 심이 얼마나 남았는지 뚜껑을 열어 확인해 보는 부가적인 재미를 누린다.

모나미 153 볼펜 한 자루에 평균적으로 소모되는 A4 용지는 15.6장이다. 한 자루의 잉크를 다 쓰는 데 드는 시간은 평균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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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용지로 162 (옥천동 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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