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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물, 인터뷰] 자아 예술가 아빠, 다단조

강다방 2022. 5. 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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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물, 인터뷰
자아 예술가 아빠, 다단조



2019년 문화체육관광산업통계에 의하면 예술산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약 70만명, 2020년 우리나라 전체 인구가 5,100만명이니 예술가는 전체 인구의 약 1.3%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예술가가 부부가 되어 아이를 낳는다고 가정했을 때, 아빠의 비율은 약 0.7%로 실제는 더 적을 것이다. 예술가면서 동시에 아빠인 사람들의 이야기. 예술가와 아빠, 자아는 과연 함께 공존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통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제목 : 자아 예술가 아빠
기획, 편집, 인터뷰 : 김다은
글 : 김다움, 장종완, 장준호, 조형준
인터뷰 참여 : 문연욱, 문이삭, 여다함, 이중한, 정의택, 한받
펴낸곳 : 다단조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168쪽
크기 : 150x225mm
가격 : 20,000원
발행일 : 2022년 1월 30일
ISBN : 979-11-973501-1-5 [03600]



강다방 이야기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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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물] 자아 예술가 아빠 : 강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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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예술가 엄마·아빠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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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HOOD ARTISTHOOD FATHERHOOD
자아 예술가 아빠




나도 육아 초반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사실 시간이 흐르면 잊힐 만도 하지만, 결코 잊지 못하는 지점들이 있다.

아기 씻기는 자세가 지금도 나온다. 몸이 기억한다. 아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일에 태어났다. 잊을 수가 없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출산 후 우리는 조리원을 가지 않고 집으로 바로 왔는데 와주시기로 했던 산후도우미 분의 스케줄이 밀려서 일주일 뒤에나 오실 수 있었고, 게다가 아기가 예정보다 며칠 더 빨리 태어나는 바람에 병원에서 오자마자 아무도 없이 며칠을 나랑 와이프와 아기, 셋이서 보내야만 했다. 부엌에서 물 틀어 놓고 몇 시간 동안 달래고 있으면 애도 지쳐 자기도 하고, 와이프한테 안방에서 자라고 하고 딸이랑 나랑 같이 울면서 소파에서 잠든 날도 있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 오랫동안 목욕하고 재우는 일을 맡아 했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상과 예술 활동이 매일 얽혀있지 않나?
늘 양쪽으로 신경을 써야 하고, 예민하게 주시해야 하는 삶의 연속이다.

예술가의 시간이라는 게 유동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대체 가능해 보이기 쉽다. 아이를 씻기고 재워야 하니 몇 년 동안은 신데렐라처럼 8시 이후의 귀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시 오픈닝에 참석할 생각을 아예 못 했다. 아주 일찍 가서 얼굴도장 찍고 오는 정도였다. 개인전 준비를 하며 시간 투자를 많이 못 하는 상황도 계속 쌓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아이 탓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너 때문이야'라는 말은 안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했을 때 아이 때문이다 스스로 비겁하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그때 잠을 더 줄이고 뭐라도 더 했으면 됐을까? 사실 그것 역시...




육아를 하다 보면 시간과 생각의 흐름이 토막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온종일, 일주일 내내 작업만 하는 삶이 과거에는 있었겠지만, 더는 아니다. 예술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계속 생겨나는 단절의 순간들을 이 대처하고 또 그 틈을 어떻게 메우나?

솔직히 잘 안 된다. 그게 내가 학원을 그만둔 이유다. 아이 낳기 전에 어린이 미술학원에서 일했다. 오후 1시부터 6~7시까지 학원을 하고 아침 시간과 학원 정리 후 밤 10시까지의 시간에 작업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몇 시간, 밤에 두세 시간 정도 작업하면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그래서 알고리즘을 짜고 단순히 수행만 하면 되는 컴퓨터 작업을 시도했다. 그랬더니 작업이 한정되고 뻔해졌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나는 학원 일을 그만하기로 결정해야 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내가 상황 전환이 빠르지 않고, 멀티태스킹도 잘 안 되는 사람인 걸 알았다. 특히 요즘 더 버거워하는 것 같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치 일이 엄청 많고 자주 하는 줄 알 텐데, 그런 게 아니라 단지 작업과 일이 겹치는 기간에 힘이 든다는 말이다.

일과 예술, 부부의 에서 돌봄과 가사노동의 어떻게 맞추며 살고 있는지?

나와 와이프 둘 다 프리랜서 예술가이다 보니 시간을 나눠 쓰다가 일이 서로 겹치면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린다. 사실 이 인터뷰를 하는 시간도 와이프한테 빚을 지는 거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내 작업이 경제적으로 환산이 안 되는 문제도 있다. 이래저래 더 손해를 보는 건 항상 와이프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내가 허리를 다쳐 더하다. 다치기 전까지 아이와 밤 시간을 보내는 건 주로...




#2. 고도를 기다리며

월요일 아침이 되면 출발 총소리를 기다리는 백 미터 달리기 선수의 상태가 된다. 주말 내내 서로 부대끼며 생긴 스트레스와 그림을 그리지 못해 생긴 금단 현상을 작업실에 출근해 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방전된 휴대폰에 충전기를 꽂듯 작업실 의자에 몸통을 꽂아 자아를 살짝 설레기 시작했고 뇌는 이미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부리나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첫 번째 목적지인 어린이집으로 가기 위해 현관 앞 신발장 출발 선상에 모두 서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는 화장실을 가야겠다고 하거나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둥 뒷북을 치기 시작한다. 마치 누군가의 부정출발로 인해 총알처럼 튀어 나가던 다른 선수의 근육들이 허무함을 느끼는 순간 같다. 한정된 작업시간 탓에 1분 1초의 지체에도 초조함과 짜증이 올라온다. 욱해서 화내는 순간 가족 모두의 멘탈 리듬이 바닥으로 처박힐 거라는 걸 알기에 꾸우욱 참아본다. 이런 날은 주차 위치도 까먹어 옅은 매연을 듬뿍 마시며 드넓은 지하를 헤매고 다닌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겨우 찾은 차를 유저의 어린이집에 도착한 순간, 부정출발은 또 한 번 발생한다. 낮잠용 이불이나 숙제 등 중요하 거의 빼먹고 오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 가져와야만 하는 상황이다. 이날은 실격이다.

육아는 기다림과 변수의 싸움인 것 같다. 성격이 급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것은 치명적인 비수다. 심지어 코로나라는 인류 최대의 변수가 생겨 온전히 나와 내 일을 위한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었다. 부인과 아이에 대한 친절도는 그림 그리는 양과 대체로 비례하기에 모두에게 비상사태이다. 이번에도 가족의 평화를 위해 비극적 상황 속에 숨어있던 긍정적인 지점을 찾아 정신 승리를 거머쥐었는데 그것은 바로 모자란 작업시간 탓에 그림이 텁텁해지는 일이 줄어든 점이다. 아이가 없던 시절, 마음을 열지 않는 그림을 향해 밤새 붓을 질척거려 망치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지금은 입시미술처럼 마감 시간이 되면 좋든 싫든 손을 떼야 한다. 물론 붓끝이 벌새처럼 날아다니는 날 (1년에 몇 번 없음) 작업을 멈춰야 할 때는 정말이지 초인적인 인내가 필요하다. 이런 날은 '아쉬움 가득한 멈춤의 시간 동안 진행 중인 그림에 대해 좀 더 깊게 사유해 보고 더 나은 지점으로 방향을 틀어볼 기회를 가지게 된다'라는 자기 위로로 내 안에 꿈틀거리는 악마를 진정시켜야만 한다.

문득 딸에게 '1+1'을 처음 가르칠 때가 생각난다. 나에게는 당연한 상식이자 과자 먹듯 쉬운 일이 아이에게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 벽을 꼬물꼬물 슬로우비디오처럼 넘어가는 귀여운 달팽이를 차분히 기다려줘야 하지만 사실은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이... 이걸 왜 이해 못 하니?? 그냥 2라고 외워라!! 라고 소리 지르고 싶지만, 오은영 박사님에게 혼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참고 기다려 본다. 가끔 인내에 실패해 버럭 하는 내 모습을 보면 그토록 미워하고 극복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의 영혼과 겹쳐지는 것을 느낀다.

부끄러운 마음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종료해 보려고 허둥대지만 이미 모두의 밥에 모래가 뿌려진 후다.




#3. Winter is coming

글을 쓰고자 처음 마음먹었을 때 인문학 향이 살짝 나는 산뜻하고 유머러스한 에세이를 쓰고 싶었는데, 어느새 신세 한탄으로 도배 된 탄원서가 되어버린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이기도 하지만 다둥이를 키우는 부모가 보면 코웃음 질까 민망하다. 집에 사는 고양이와 식물, 부인, 그리고 내가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왠지 살아있는 모든 것의 에너지를 딸아이가 제습제 마냥 흡수하는 것 같다. 가끔 그녀에게 에너지를 1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이기적인 생각도 들지만, 그때마다 도수 높은 딸의 귀여움과 엉뚱함에 취해 내 이기심의 성벽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아실현과 자기희생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그 누가 승리해도 속이 개운하지 않을 것이다. 이 거대한 모순을 상생시킬 방법을 끝없이 고민하고 여러 정신승리의 노하우를 축적해 곧 다가올 사춘기라는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제임스 딘 같은 조카를 키우며, 매일 소화제를 입속으로 털어 넣던 친누나의 경험담을 자양분 삼아 몇 년 후에 있을 딸과의 대규모 전투를 대비해본다. 그때가 되면 나는 아마도 소화제를 먹으며 수행적 성향을 강하게 띤 회화를 하고 있지 않을까?

2021 가을, 장종완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소외된 사람의 생각과 이야기를 음악으로 대변하는 예술가이다. 나는 미술계 안에서 아빠 또는 엄마라는 정체성이 소수라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자아, 예술가, 엄마〉라는 작업이 나왔고 계속해서 부모 예술가들의 연대를 꿈꾸고 있다. 본인이 속한 음악씬에서 '아빠' 혹은 '부모'라는 정체성은 어떤 위치인가?

음악씬 안에서도 아빠가 잘 없다. 엄마도 잘 안 보인다. 엄마나 아빠라는 정체성은 이쪽에선 흐릿하다. 그렇지만 아이와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곡을 만드는 일이 훨씬 더 이 분야를 풍성하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예술가의 삶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어렸을 때부터 예술가를 꿈꿨던 것 같긴 한데, 구체적으로 예술 자체가 이유는 아니었다. 나는 출퇴근은 못 할 사람이란 걸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내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일이 까 하다가 자연스럽게 예술가가 된 것 같다. 만족하면서 지내고 있다.

중학교 때 읽은 법정 스님의 다음 말에 꽂혔고, 나의 많은 것이 바뀌었다. “누구에게나 삶의 고민이 있다. 그것이 그 삶의 무게이다. 그것이 그 삶의 빛깔이다.” 특별히 예술과 상관이 없더라도, 이 말이 내가 무엇을 결정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내가 지금 하는 고민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내 빛깔과 무게가 결정된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때부터 하나둘씩 바뀌기 시작하더라. 지금까지도 자연스럽게 같은 질문이 이어져 오고 있다.

예술가로 살아오면서 부모이자 예술가가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 또는 확실한 계획이 있었을까?

전혀 없었다. 상상할 수 없었던 게 더 맞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우리 둘 사이에 한 명이 더 낄 수는 있겠구나, 싶은 정도였다. 당장은 아니겠지 했다. 최근에 든 생각은 애는 낳는 게 아니라 만남이라는 것이다. 우리와 만나는 그날이 오면 아이를 팔 벌려 환영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 생각이 파트너와 교감이 많이 되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별로 없었지만, 언젠가는 만나리라 싶었다. 사실 아이가 아직 태어난 게 아니라서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감이 안 잡힌다. 어찌 보면 난 이책의 독자 입장에 가깝다. 예술가 아빠로서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위치는 아직 아닌 듯하다. 오히려 직접 겪기 전이라 이 인터뷰가 가능했던 것 같다.




남성으로 자라난 자신에게 또 다른 남성을 길러내는 의무가 주어졌다. 아이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동안 부모의 역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보았나.

아이의 성별 구분보다 중요한 건 '애를 어떻게 기르지? 최대한 생긴 대로 살 수 있게 어떻게 키우지?'이다. 우리는 이 아이를 잠시 보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무언가 해주어야 하기보다, 이 사람이 정말 사람이 되고 성인이 되는 과정, 어엿하게 한 사람의 역할을 하기까지 약간의 시기를 우리가 봐주고 보호해주는 그런 역할을 어떻게 잘할까를 생각한다. 아이가 어떤 빛깔을 띠는지를 잘 관찰해주고 그 과정에 내가 보조를 맞추는 정도인 거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보다는 앞으로 아이의 친구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거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영향을 많이 주고받을 텐데 누구를 사귈지, 그 친구들이 나랑 잘 맞을지도 궁금하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볼 때 아이를 키우며 예술을 해야 하는 미래의 부모 예술가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다면?

피할 수 없는 거니 포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아내와 공동으로 육아를 할 거면 협의를 해서 50대 50으로 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못했지만, 어린이집은 되도록 빨리 보내라. 어떻게든 예술가로서의 커리어를 길게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업도 안 되고, 나쁜 감정으로 애를 키울 수도 있다. 까딱 잘못 생각했다가는 '너 때문에...'라며 아이 탓을 하는 쪽으로 기울 수도 있다. 삶을 길게, 아주 길게 봐야 한다.

예술가 문연욱은 아이에게 어떤 아빠이길 바라는가?

아빠는 아빠일 거다. 하지만 전형적인 아빠가 아니길 바란다. 엄마 같은 아빠가 되고 싶다. 우리 가족 안에서 '남자애니까'라는 고정관념은 다행히 없었다. 아이도 어릴 때는 분홍색 옷도 입히고 머리도 길렀다. 지금은 집안일 하는 나를 보며 자라는 중이다. 그런데 유치원에 가니까 아니까 이렇다'며 가르치더라. 그럼 나는 '여자도 그런 거 할 수 있어. 남자만 그런 거 아니야'라며 다시 말해준다.




임신 후부터 출산할 때까지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유아가 고 힘들다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작가로 활동하는 것, 그러니까 작품을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이야기였다. 굉장히 힘든 건 참고 견디면 된다지만 활동이 불가능해진다는 말은 조금 무서웠다. 물론 무서운 이유는 예술을 너무 사랑하거나 작업을 꼭 해야 해서 라기보다는 생계 걱정이 앞섰고, 일은 손에서 놓기 시작하면 점점 끊기게 되며,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히다 이 업계의 특성 중 하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민선이 임신한 시기와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함께 찾아왔고, 계획된 공연과 전시도 취소되기 시작했다. 막막하기도 했지만 아직 출산도 하지 않았고 닥치지 않은 일들이라 막연한 두려움만 있을 뿐 실제로는 한가롭고 즐겁게 보냈다. (아내이자 함께 팀으로 일하는) 민선과 옥탑 작업실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뭐 어떻게 되겠지?'라고 얘기하고 나면 좀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밥을 해 먹고 한강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예술 외에 다르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정말이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고 (심지어 운전면허도 없었고 여전히 없다) 그동안 예술 한다고 다른 것들은 등한시했던 내가 점점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난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민선도 함께 이것저것 얘기해보며 고민했지만 금세 졸려서 잠들었고 딱히 좋은 수는 없었다. 이렇게 예술은 예술가의 삶을 위협하고 있었고, 예술이 삶을 구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생각들도 다 무너졌다. '이제 환상 같은 건 하나도 없어, 예술이 내 목을 조르는 거 같아.' 난 그냥 잘 살고 싶었다. 잘 살고 싶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꾸준히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작업실 방바닥에 누워서 멍하게 있다가 베이글을 만들어볼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건 그냥 빵 중에 그나마 제일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 몇 년 전 뉴욕 여행 중 유대인 박물관 지하에서 먹었던 베이글이 생각나서였다.

"베이글 어때?"
"좋아."

민선은 바로 유튜브에 베이글 만드는 방법을 검색했고 그길로 우리는 뭔가에 홀린 듯이 동네 마트로 가서 강력분 밀가루, 소금, 설탕, 이스트, 식용유, 저울, 밀대와 큰 볼을 사서 돌아왔다. 처음 해보는 손반죽부터 시작해 1차, 2차 숙성과 성형, 마지막 숙성 후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내서 오븐에 구우면 되는데 오븐이 없다. 결국 에어프라이기에 집어넣었는데, 잠시 후 정말 기적처럼 베이글이 완성되었다.

"어때?"
"진짜 맛있어"

모양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약간 프레첼 같았다) 너무 맛있고 신기했다. 그날 밤 옥탑 작업실은 흥분으로 가득 찼으며, 민선과 나는 신나고 들떠서 밤늦게까지 베이리 한번 만들었다. 두 번째는 모양이 더 잘 잡히고 맛도 조금 더 있었다. 민선은 인터넷에서 가장 저렴한 오븐을 주문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와인을 마시고 있지만, 생각해보니 아이를 키우면서 딱히 못 하는 게 없다. 민형이는 우리에게 짐이나 방해요소가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고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다. 민선과 나는 민형이와 함께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내년에 프랑스 투어도 함께 갈 예정이다.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쓰고 보니 베이글 이야기와 출산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아마 내 삶에서 예술은 딱 그 정도의 비중이어서가 아닐까.




'너도 나중에 애를 낳아서 키워보면 부모를 이해하게 될 거야'라는 말을 부모님께 수도 없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았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 키울수록 부모님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고, 난 이해력이 떨어지는 건가 아님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더더욱 부모님의 생각과는 멀어져만 갔다. 부모님은 늘 속상해하셨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걱정과 속상함은 스스로를 갉아먹어 피폐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이 가속되는 것, 그게 바로 부모님의 걱정과 속상함이다.

결혼하기 전 10년 정도를 부모님과 담쌓고 살았다. 난 어떻게든 혼자서 살아보려고 노력했고, 부모님 눈에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데없는 장난만 치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맞다. 아빠가 생각했던 '아무것도 안 하고 쓸데없는 짓 하는 거' 그게 예술이 맞긴 하다. 그니까 난 예술을 열심히 했던 거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가족과 멀어졌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해결하면서 살았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대비 같은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아기나 어린이는 질색이었으며, 결혼이나 안정적인 삶 같은 것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예술만이 최고의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에서야 말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암튼 지금은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두 명이나 있다. 돈 되는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하며 누가 예술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려 하면 바로 뛰어서 도망간다. 예술에서부터 거리를 두고 다시 예술을 바라보고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이건 비단 예술뿐만이 아니다. 가족도 일종의 권련ㄱ관계다. 그 안의 단단한 연결 고리에서 벗어나면서 나는 권력관계를 다시 바라보고 게 되었고, 이런 태도는 중심에서 벗어나기, 핵심을 말하지 않기, 우연을 신뢰하기, 이 며서 내가 조금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물론 부모님은 여전히 불만이 많으시지만) 예전에 무관심했던 가족의 이야기도 조금은 관심을 두고 흥미롭게 느껴지고, 심지어 친척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재밌게 다가왔다. 그동안 한 번도 질문해보지 않았던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그리고 아빠가 이젠 궁금하다.

난 크는 동안 아빠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물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아빠도 자세히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학교에 부모님의 직업을 적어내야 할 때 아빠는 자영업이라고 쓰라 했는데 난 자영업의 뜻도 정확히 몰랐다. 그냥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번 돈을 다 가질 수 있는 직업이라고 짐작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돈을 많이 벌진 못했던 것 같다. 커서는 아빠가 옛날에 프로야구 선수였고, 삼미슈퍼스타즈에서 (정확한 포지션은 모르지만) 그냥 포수였던 것 같다고 말했고, 감사용 아저씨와 친해서 집에 자주 놀러 왔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아빠와 나는 마음은 친해지고 싶었지만 실상 친해지지 못했고, 생각해보면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여전히 많다.

가끔 민형이가 멍한 눈으로 초점 없이 어딘가를 응시할 때를 보면 나의 모습을 보는 동시에 아빠의 멍한 눈동자가 생각나기도 한다. 난 그 눈동자를 늘 기억한다. 멍 때리는 건 유전인가...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하지만 사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데 정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멍 때리기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길을 가다가, 버스에서, 밥 먹다가, 영화나 책을 보다가, 누군가와 얘기하다가, 술 마시다가, 춤추다가 등등. 이래서 다들 유전이 무섭다는 거겠지?

결국 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지만 아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 역시 아빠가 되었고 아빠가 될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유전자도 결국은 우연들의 조합일 뿐이고, 많은 잠재적 가능성 중의 하나다. 목표와 기대와 예상에서 벗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어떻게 수용하느냐의 문제다.




아버지가 화가이다. 예순이 넘으신 뒤로 개인전은 안 하시지만 간간이 동문과 단체전을 하면 한두 점 내고 하신다. 아버지는 이십 대에 상경하여 검정고시를 보시고 지금의 서울 메트로, 지하철 2호선이 뚫렸을 때 서울지하철공사에서 일하셨다. 대학을 가고 싶었던 열망이 너무나 크셔서 서른이 넘어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시고 내가 유치원 때쯤 동국대 미대를 들어가셨다. 아버지가 서른셋, 서른네 살이던 때이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가시밭길이 시작되었다. 생계는 장사하시는 어머니가 거의 꾸리셨고, 아버지는 대학생으로 장사를 도우며 작업하셨다. 나중에는 기간제 교사로 중학교에서 몇 년 근무도 하시고 대학에서 겸임 교수로 전공수업도 10년 정도 하시고 최근까지도 작업을 하셨다. 지금은 어머니와 판교에서 음식점을 하시는데 어머니가 쉬시는 주말에 혼자 가게에 나가서 벽에다 그림을 그리신다. 몇 주 지나면 다 지우고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리시는 식이다. 그렇게 본인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고 계신다. 예술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신 아버지를 평생 보면서




사회는 어린이에게 소홀하다. 단지 어른이 아닌 어린이라는 이유로 가벼이 여기고 관심 밖에 두거나 무시한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홀대받지 않은 사회가 되려면 나부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나 생각이 많아진다. 어린이가 시민으로 내 사람으로서 존중받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부모인 것을 떠나 어린이와 함께 살고 옆에서 지켜보는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디자인을 할 때 소비자가 제품을 접하는 과정에 관심이 있다. 요즘은 결제 방식의 자동화로 인해 노인이나 아이가 소비에 접근하기 어렵다. 심지어 얼마 전에 주민센터에서 그걸 가르치는 수업이 있다는 뉴스를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플랫폼마다 결제 방식도 다 다르니 한 곳에서 결제하는 방법을 배웠어도 다른 곳에 가면 또 다른 UX와 인터페이스를 써야 한다. 우리 어머니도 그런 이유로 패스트푸드 식당에 가셨다가 돌아오신 적이 있다. 드시고 싶은데 못 드셨다는 말을 듣고 안타까웠다. 아이들의 경우, 예전에는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구멍가게 주인에게 드리면 막대사탕 하나라도 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카운터나 디지털 스크린도 눈높이보다 위에 있고, 발판도 없다. 아이들은 선택권이 아예 없는 거다. 돈이 있어도 보호자 없이는 사고 싶어도 못 사 먹는다. 삶이 좀 삭막해졌다. 디지털 문명이 사회에 스며들면서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들이나 활용을 잘 못 하는 사람은 소외계층이 되어 버린다. 사고 싶어도 사지 못하고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디자인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자연스럽지 않은 인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보다 한 권만 읽은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지 않나. 한정적인 지식 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도 많지만, 내가 여러 관점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에 감사합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섯 개의 국가를 오가며 살다 보니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새로운 나라에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덤덤하게 잘 대응하는 사람이 되었다. 세상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나한테는 재산인 거다.




느슨한 연대라도 좋으니 현실의 버거움과 문제에 대해 함께 모여 서로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예술계 내 부모는 몇 퍼센트나 되는지, 그들은 어떤 환경에서 육아와 예술을 하고 있는지,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지,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어떤 변화를 도모해야 하는지 등 다양한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제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아, 예술가, 엄마〉와 〈자아, 예술가, 아빠> 사이, 나는 한 아이의 엄마에서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여전히 육아라는 돌봄과 일을 통해 행복을 얻고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나를 통해 세상에 나온 아이들과 함께 각자의 속도로 함께 성장하는 시간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돌다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두드리며 건너는 중이다. 모든 사람의 속도가 다르듯, 아이의 속도감 역시 어른의 그것과 다르다. 그런 아이들을 기준에 못 미치는,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 보는 시선이 안타까울 때마다 타인의 속도를 잘 관찰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애나 키우는 사람' '애밖에 없는 삶'이 아닌, 나와 주변을 돌보는 사람이자 아이와 시공간을 공유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아마도 <자아, 예술가, 엄마>와 〈자아, 예술가, 아빠>가 나의 가장 큰 동력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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