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년이 온다, 한강
제목 : 소년이 온다
저자 : 한강
펴낸곳 : 창비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216쪽
크기 : 153x224mm
가격 : 15,000원
발행일 : 2014년 5월 19일
ISBN : 978-89-364-3412-0 (03810)
다가오는 12월 10일, 스웨덴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식이 열립니다. 수상식을 일주일 남긴 어젯밤은 <소년이 온다>가 떠올라 무섭고 괴로운 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 일상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노벨문학상 소식 이후, 강다방에서는 한강 작가의 책을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굳이 강다방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소개했고, 무엇보다 내용과 묘사가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제 계엄령 포고령에 포함된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는 내용을 보고 무용하게 느껴졌던 문학이 사실은 무용하지 않음을,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고 당당히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식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 <소년이 온다>를 소개해봅니다. 다들 평안한 저녁 보내세요!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정말 비가 쏟아지면 어떡하지.
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청 앞 은행나무들을 지켜본다. 흔들리는 가지 사이로 불쑥 바람의 형상이 드러나기라도 할 것처럼. 공기 틈에 숨어 있던 빗방울들이 일제히 튕겨져나와, 투명한 보석들같이 허공에 떠서 반짝이기라도 할 것처럼.
너는 눈을 크게 떠본다. 좀 전에 가늘게 떴을 때보다 나무들의 윤곽이 흐릿해 보인다. 언젠가 안경을 맞춰야 하려나. 네모난 밤색 뿔테 안경을 쓴 작은형의 부루퉁한 얼굴이 떠올랐다가, 분수대 쪽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박수 소리에 묻혀 희미해진다. 여름이면...
뚜껑을 뜯어내고는 너에게 건넨다.
지금부턴 내가 있을 테니까 집에 가서 옷 갈아입어. 여기 와볼
사람들은 이제 다 왔다 갔나봐.
난 비 별로 안 맞았는데. 누나가 옷 갈아입고 와.
우물우물 카스텔라를 씹으며 네가 대답한다. 목이 막혀 요구르트를 들이켠다.
너, 땀 냄새 많이 나. 도청서 먹고 잔지 한참 됐잖아.
네 뺨이 붉어진다. 별관 화장실에서 세수할 때 늘 머리까지 함께 감았다. 시취가 뺐을 것 같아 밤이면 이를 딱딱 부딪히며 찬물로 몸도 씻었는데, 소용없었나보다.
집회에서 들었는데, 계엄군이 오늘밤에 들어온대. 집에 가면 이제 여기 오지 마.
은숙 누나가 문득 고개를 움츠린다.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
사인하십시오.
장부에 서명한 뒤 그녀는 가제본을 받아든다.
말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들은 집도를 끝냈고, 그 결과물을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창구를 등지고 그녀는 서너걸음 걸어간다. 의자들 사이에 엉거주춤 선 채 가제본을 넘긴다. 한달 동안 그녀가 타이핑과 원문 대조와 삼교를 마쳐 거의 외우다시피 한, 이제 인쇄 절차만 남아 있는 책이다.
그녀가 받은 첫번째 느낌은, 페이지들이 불탔다는 것이다. 불에 타서 검은 숯덩어리가 되었다.
검열과에 가제본을 제출한 뒤 정해진 기일에 찾아오는 것은 그녀가 입사한 뒤 매달 반복해온 일이었다. 서너군데, 많게는 여남은 군데 먹선으로 지워진 부분들을 확인하고 기운이 빠져서 회사로 돌아가, 수정 작업을 거친 가제본을 인쇄소에 넘기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 가제본의 도입부 열 페이지 정도는...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다음 문단은 검열 때문에 온전히 책에 실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어서 먹선으로 지워진 넉줄의 문장들을 그녀는 기억했다. 번역자의 살찐 턱과 허름한 감색 점퍼 핏기 없이 노릇노릇하던 낯빛을 기억했다. 물잔을 만지작거리던 길고 거무스름한 손톱들을 기억했다. 그러나 정확한 이목구비만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책을 덮고 기다렸다. 창밖이 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누구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계단을 올라온 군인들이 어둠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조의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사람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린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었던 겁니다.
*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 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학생 대표의 말대로 우리가 총기를 도청 로비에 쌓아놓고 깨끗이 철수했다면, 그들은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을지도 모릅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더 깊이 숙인다.
나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재판장님이 곧 들어오신다. 끽소리만 내도 즉석 총살이다, 알겠나. 입 닥치고, 끝까지 고개 숙이고 있어야 한다. 최후변론은 일분을 초과하면 안된다, 알겠나.
그들은 장전한 소총을 들고 의자와 의자 사이를 다니며, 자세가 바르지 않은 사람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쳤습니다. 재판소 밖에서 가을 풀벌레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날 아침 새로 받은, 세제 냄새가 풍기는 깨끗한 푸른색 수의를 입고서 나는 즉석 총살이란 말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정말 닥쳐올 총살을 기다리듯 숨을 죽였습니다.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
*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
살아 있는 김진수와의 만남은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 것이 처음의 원칙이었다. 십이월 초부터 다른 아무것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되도록 약속도 잡지 않고 자료를 읽었다. 그렇게 두달이 지나 일월이 끝나갈 즈음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다.
꿈 때문이었다.
한 무리의 군인들을 피해 나는 달아났다. 숨이 턱에 받쳐 뜀박질이 느려졌다. 그들 중 하나가 내 등을 밀어 넘어뜨렸다. 몸을 돌려 올려다보는 순간 군인이 총검으로 내 가슴을, 정확히 명치 가운데를 찔렀다. 새벽 두시였다. 벌떡 일어나 앉아 손으로 명치를 짚었다. 오분 가까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덜덜 턱이 떨렸다. 울고있었던 줄도 몰랐는데, 얼굴을 문지르자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
며칠 뒤에는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1980년부터 지금까지 삼십삼년 동안 지하 밀실에 가둬둔 5·18 연행자들 수십명이 있다고 했다. 이제 비밀리에, 내일 오후 세시에 모두 처형할 거라고 했다. 꿈속의 시간은 저녁 여덟시였다. 내일 오후 세시까지 고작...
특별하게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다.
처음 자료를 접하며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연행할 목적도 아니면서 반복적으로 저질러진 살상들이었다. 죄의식도 망설임도 없는 한낮의 폭력. 그렇게 잔인성을 발휘하도록 격려하고 명령했을 지휘관들.
1979년 가을부마항쟁을 진압할 때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캄보디아에서는 이백만명도 더 죽였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확대되었을 당시, 군은 거리에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발사했다. 인도적 이유로 국제법상 금지되어 있던 납탄을 병사들에게 지급했다. 박정희의 양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각별한 신임을 받았던 전두환은, 만에 하나 도청이 함락되지 않을 경우 전투기를 보내 도시를 폭격하는 수순을 검토하고 있었다. 집단발포 직전인 5월 21일 오전, 군용 헬기를 타고 와 그 도시의 땅을 밟는 그의 영상을 보았다. 젊은 장군의 태연한 얼굴...
*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목이 길고 옷이 얇은 소년이 무덤 사이 눈 덮인 길을 걷고 있다. 소년이 앞서 나아가는 대로 나는 따라 걷는다. 도심과 달리 이곳엔 아직 눈이 녹지 않았다. 얼어 있던 눈 더미가 하늘색 체육복 바지 밑단을 적시며 소년의 발목에 스민다. 그는 차가워하며 문득 고개를 돌린다. 나를 향해 눈으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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