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향교, 대한민국 보물지정 기념
매혹적인 강릉의 문화유산
글 : 최기순
강릉향교
(姜倡), 전 공조참의 김몽호(金夢虎) 등 22인에 의하여 굴산(屈山, 지금의 학산) 왕고개 위에 세우고 석천묘(石泉廟)라 하였다. 효종 4년(癸巳, 1653) 강원도관찰사 김익희(金熙, 재직 1651.10~1652.5), 강릉부사 이만영(李晩榮), 전 참의 이상협(李尙謙) 등 20인이 협의하여 구정 언별리(지금은 강동면)로 옮겼으며, 송담재(松潭齋)라 하였다. 현종 1년(庚子, 1660) 송담서원(松潭書院) 사액을 받았다.
○ 송담서원(松潭書院)은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 1115번지에 있는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모시고, 해마다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강릉향교 장의가 제집사를 맡고, 문중과 유림이 참석한 가운데서 제향을 한다.
○ 처음 석천묘(石泉廟) 창건(創建)은 선조 24년(辛卯, 1591) 선비 김경시(金景時) 등 유림이 중심되어 도학의 종장이고 당대의 석학(碩學) 율곡 이선생을 모실 사당을 탄생지인 강릉에 건립하자는 공론이 있었으나 임진왜란(1592~1598)으로 성사되지 못 하고, 또 광해군 9년(丁巳, 1617)에 다시 논의되었으나, 병란이 침식(息; 소란스러운 일 따위가 가라앉아 그침)되는 것을 기다린 후로 미루었다. (石川書院粉開時通文) 최초 발의에서 40년이 지나서 인조 2년(甲子, 1624) 강릉부사 강세창(細倡)에서 석천묘 건립을 위한 석천묘창건도청(石川廟創建都廳)을 만들고, 책임자는 전 공조참의 김몽호(金夢虎)로 하고, 전 사헌부감찰 이오, 전 찰방 조학서(曺鶴瑞), 원장 이상필 외 2인과 조성유사 김사준(金浚)외 15인 등 22인으로 조직하였다. 인조 8년(庚午, 1630) 2월 석천(石川廟)를 왕고개 위에 완공하고 강릉부사 이명준(李 命俊, 재임 1628.1~1630.5)은 1630년 2월 17일 석천묘(石川廟) 봉안제를 지냈다. 학술 문예를 연구하기 위하여 세웠으나 건립 뒤에는 당파를 조장하는 소굴이 된 것도 사실이다.
「강릉의 역사 변천과 문화」
○ 학산리(鶴山里) 왕고개[王] 북동쪽에는 왕현성지(王)가 있다. 한때는 장안성(長安城)이라 하였으며, 예국시대(濊國時代) 축성(城)이라고 전하나 일반적으로 왕우), 왕창(王昌)이 피난할 때 쌓은 성이라 한다. 약 300간(540m)의 산성(山城)으로서 성지의 동남쪽 약 100m 정도는 석성(石城)이고, 440m는 토성(土城)이다. 축성방식은 월성(月城 甕城 모양이 반달 같다)인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강릉의 역사변천과 문화」
○ 구정 왕고개에 석천묘(石泉廟)를 세운 후 22년이 되어 석천묘 이건(建)을 논의하였다. 효종 3년(壬辰, 1652) 3월 제향 때 전 참봉 김호문(金文) 등 15인이 이건(移建)을 토의하여 내용을 알리는 통문을 생산하였다. 내용은 "부 남쪽의 굴산(山)에 있는 율곡선생 사우 석천묘(石川廟)는 그 터가 매우 깊고, 산의 면배(面背: 앞쪽과 뒤쪽)는 몹시
척박하며, 더욱이 산세가 낮아서 벼슬 오르는 일에 방해가 되므로 이건하기로 한다"는 것 이었다. 이건 상소는 1652년 화민(化民; 자기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사는 백성 이 그 고을의 원에게 자기를 이르던 말) 김집(金)외 23인이 강릉부사 이만영(李晩榮: 재직 1651.9~1653.9)과 함께 강원관찰사에 상소하였다. (府使李公晚榮書)
○ 강원도관찰사 김익희(金益熙, 재직 1651.10~1652.5), 강릉부사 이만영(李晩榮)은 같은 해(1652) 3월 이창도청(都廳)을 만들고, 책임자는 전 참의 이상협(李尙謙)으로 정하고, 전 참봉 김호문(金好文) 등 20인으로 도청을 조직하였다. 다음 해(1653) 3월 석천묘를 굴산(山)에서 구정촌(求正村)27)으로 옮기는 공사를 시작하여 8월에 준공한 후 강릉부사 이만영(李晩榮)은 효종 4년(癸巳, 1653) 음력 8월 17일 석천묘 이안제(石川廟安祭)를 지냈다.
○ 송담재(松齋) 사액서원으로 하고자 효종 10년(己亥, 1659) 2월 10일에 유생(生) 생원 김(金), 최념(崔) 등 7인은 사우의 이름을 '송담재'로 하고 사액상소를 올렸다. 현종 1년(庚子, 1660) 9월에 '송담서원(松潭書院)'이라 명명한 원액(院額)을 하사받아 9월 22일에 선액사제(宣額賜祭)를 지냈으며, 헌관은 예조정랑 최문활(崔活), 강릉부사 김운장(金雲長), 전참봉 김호문(金文)으로 하였고, 대축은 찰방 이암(李 이 하였다. 송담서원 이건 후 67년이 된 영조 2년(丙午, 1726)에 송담서원묘정비(松潭廟庭碑)를 건립하였으며, 글은 영의정 정호가 짓고, 글씨는 중추부사 민진원이 썼다. 기해년(己亥, 1755) 4월 20일 강당을 중수하였다. (松潭齋誌-宣額賜祭)
○ 현종 1년(庚子, 1660) 사액서원 송담서원(松潭書院)의 건물 규모는 묘우廟) 6칸, 월랑(月) 7간, 유생들이 공부하던 동재(東齋)·서재(西齋) 각 3간, 강당 10간, 광제루(樓 3간, 서책고(書庫) 3칸을 지었으며,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밭 3결(結), 원생 30인, 모속인 22인,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율곡의 어머니)가 손수 그린 초충도병풍 8첩, 옥산(玉山) 이우(李瑀; 율곡의 동생)의 글씨를 보관하였다.
○ 송담서원(松潭書院)은 약 200년 동안 1,220인의 유생을 배출하였다. 영조 32년 (1756)에 묘정비(廟庭碑)를 세워 서원과 율곡의 업적을 비에 새긴 것이 전하여 오고 있다. 순조 4년(甲子, 1804) 3월 3일 송담서원(松潭書院) 인근에 산불이 발생하여 서원 일부가 소실되었고, 묘우(廟宇)와 송월루(松月樓, 일명 松潭樓)만 남았다. 고종 8년(辛未, 1871) 강릉부사 이직은(李稷銀, 재임 1871.2~1875.1)은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신미년(辛未, 1871) 5월 13일 철향제를 지내고 송월루와 송담서원을 훼철하였다.
27)「松潭齋誌」의 正村은 邱村을 오기한 것으로 본다.
흔적도 없이 모두 소각하였으며, 오직 향사에 제물로 쓸 가축을 매어놓는 '계생'의 돌'만 있을 뿐이다. (松潭誌)
○ 송담서원(松潭書院) 1871년 훼철 이후 도사(都事 감사의 보좌관, 종5품) 권학수權學 오죽헌 주인)는 신의계원(信義契員)과 함께 해마다 음력 5월 13일에 위판을 매안한 곳에서 술과 과일을 준비하여 헌작례(獻)를 1901년까지 31년 동안 올렸다. 계사년(癸巳, 1893) 맹춘(春, 음력 1월) 후학 박용규(朴容圭)는 성균관대제학 鉉)에 율곡선생을 송담서원에 배향할 수 있도록 청원을 올렸다. 1902년(壬寅)에는 옛터에 제단이 만들었으며, 1905(乙巳)년에 복원(復元)코자 묘우(廟) 1칸을 세우고 현판을 '송담재(松潭齋)'라 하고 1909년(己酉)에서야 처음으로 변과 두(豆)로 제향하였다. (松潭齋誌)
○ 송담서원(松潭書院) 훼철 이후 고종 16년(甲戌, 1934) 6월에는 담장, 문, 비각의 위치 및 모습에 대하여 그림을 그려가며 의론하였고, 그 이후 감호위원 정연희(鄭然 熹), 변해철(邊海喆)이 주선하어 서원 옛터에 축대를 쌓고, 나무를 심고, 담장을 고치면서 문을 세우고 묘우와 비각을 바로잡으니 서원의 둘레가 새로워졌다. 사당을 세운 후 57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기와 일탈로 물이 스며 목재는 썩고, 벽체는 퇴락하였으며, 신문(神門)은 그을러 졌다. 1944년(甲申) 7월 송담서원회의를 개최하여 중건 할 것을 발기하였다. (松潭書院發起文)
○ 송담서원(松潭書院) 복원을 위하여 1953(癸巳)년 봄 박용규(朴容), 최벽규(崔壁)의 도움으로 송담직실(松潭直室)을 지었으며, (松潭直室記) 송담재를 중건 한지 이미 오래되었고 또 한국전란을 겪은 후라 무너지고 쓰러지고 훼손이 많아서, 1956(丙申)년 박세동(朴世東), 김진범(金振範)이 함께 맡아 중수를 하였다.(松潭齋重修記)그리고 1958년 가을에 송담재 묘정비각을 중수하였다.
○ 송담서원(松潭書院) 터에 송담재(松潭)를 세운 후 57년의 세월이 된 1961(丑)년에는 강동 유림(儒林)들이 재목을 구하고, 박용억(朴容億)이 솔선 성금을 거두어 송담재를 중 수하였으며, 1963(癸卯)년 12월에 송담재묘정비각을 수선하였다.(松潭廟宇重修記)
○ 송담서원(松潭書院)은 1976(丙辰)년에는 강원도(도지사 朴鍾星) 및 강릉향교(전교 崔 燉重)의 후원과 지역 유림의 성금으로 동재(6칸), 서재(6칸)를 증축하고, 강원도지사 박종성의 노력으로 1977년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어 선현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1985(乙丑)년 명주군(군수 鄭泰榮)에서 동재와 서재를 보수하였으며, 2014년에는 강원도의회의원 김동자(金東子)는 지방비(도비, 시비) 2억원을 확보하여 폭설 (2014. 2. 18 누적적설량 179.1cm)로 유실된 지붕기와를 교체하였으며,
서원 앞의 집 2채를 보상하여 주차장 및 공원을 만들었다. (증언 松潭書院長 金男玉)
○ 현종 1년(庚子, 1660) 사액서원이 된 송담서원(松潭書院)에는 율곡유품과 신사임당 유품을 보관하였다. 숙종 29년(癸未, 1703) 송담서원의 도유사(都有司) 조태한(曹泰 漢, 장의(掌) 신성윤, 유사(有司) 최주천(崔柱天)은 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를 병풍으로 꾸며, 송담서원에 보관하였다. 숭정 갑신년(甲申, 1644) 뒤 72년 되는 을미년(乙未, 1715)에 대사헌 정호(鄭澔, 1648~1736)는 송담서원을 방문하고 사임당의 팔첩병풍을 보고 그 감동을 표현한 발문을 썼다. 발문은 강동면 하시동리 신명선 (辛明善)의 집안 문서 속에서 발견되었다. 내용은 “옛날 성현들은 인물을 논평하되 도덕이 온전하고 재주가 갖춘 것으로서 군자라 일컬었다. 그러나 이 말은 남자들을 위해서 한 말이요 부인에게 상관없는 말이다. 나는 말하되 사람들은 이같이 여자란 다만 도덕으로써 일컬을 것이요 재주는 일컬을 것이 없다 하지만 여자로 덕이 이미 온전히 갖추어졌고, 재주도 통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 어찌 여자라고 하여 군자라 말 할 수 없겠는가 라고 싶다" (이은상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
○ 율곡(栗谷)과 우계(牛溪)를 문묘(文廟)에 종사祀)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문은 처음 乙亥年(1635)에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학생 송시영(宋時瑩)과 8도유학생 14인이 처음으로 상소하였으나 불허되었다. 효종 즉위년(庚寅, 1650)에 태학생 홍장과 8도 유학생 6인이 다시 상소하였다. 기해(己亥, 1659)년 6월에 태학생 윤항 등 杭) 각도 대표 7인이 다시 상소를 올렸으며, 임인(壬寅, 1662)년 강원도 유생 이모(李模)외 7인이 올렸다. 이어서 성균관 좨주(祭酒, 성균관에서 석전을 담당했던 종3품 벼슬) 송준길(宋浚吉), 대사성 유계병(兪)외 선비들이 상소하였다.
○ 율곡선생 문묘종사 상소를 강릉에서는 현종 2년(壬寅, 1662) 겨울 대간(諫大司諫의 준말, 정3품) 민정중(鼎)이 작성하고 강릉향교 유생 이모 등 21인의 서명하여 예조에 올렸으나 불허하니 같은 해 재소疏하였고, 참의 조복양(陽)이 글을 지어 삼소하였다. 다음 해(癸卯, 1663) 7월 생원 이모(李) 등 12인이 또 올렸으며, 현종 10년(乙酉, 1669)에 또 올려 숙종 8년(壬戌, 1682)에 성혼(成渾)과 함께 공자(孔子)를 섬기는 문묘(文廟)에 우리나라의 명현(名賢)으로 배향되었다. 「松齋誌」
○ 송담서원(松潭書院)에 보관하였던 사임당(율곡의 어머니)의 초충도병풍과 이우(율곡의 동생)의 초서글씨는 순조 4년(1804) 송담서원 화재 이후 행방을 알 수 없었으나 강릉향교(전교 朴容喆)에서 1965년 6월 율곡선생기념사업회(위원장 張聖澤)를 명륜당에 설립하고, 기념사업회에서 율곡이선생 • 신사임당 유품모집을 공고하니
사임당 유품 11점, 율곡유품 9점과 율곡의 누이동생 유품 5점이 접수되었다. 초충도병풍은 강릉시 두산(山)마을에 사는 최용근(崔容根)28), 옥산 친필글씨는 강릉시 포남동 최규한이 소장하고 있었다. 덕수이씨 이장희(李璋憙, 논산읍 花校洞 59)는 1965년도 조상의 유품인 신사임당초충도병과 옥산글씨를 우선 매입하여 보관하였다. 같은 해 (1965) 8월 1일 율곡선생기념사업회에서 이율곡선생유품수집추진위원회(위원장/문교부장관)를 발족하여 율곡· 신사임당 · 기타 유품을 매입할 때 신사임당초충도병과 옥산글씨 소장자 이장희(李璋憙)는 매각을 승낙하였고, 유품수집추진위원회에서 초충도8폭병풍과 옥산진적을 매입하였으며, 지금은 율곡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 (1965栗谷先生紀念協會關係綴)
○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은 1662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영월 장릉을 참배한 다음 강릉에 와서 공자를 모신 구산서원과 관동의 경치를 칭찬하면서 옛 자취를 찾아봐도 유현(儒賢)과 관련된 곳이 없는 것이 지역의 수치라 하였다. 그나마 강릉에 율곡 이이를 배향한 송담서원이 있어서 수치를 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1704년 관동을 유람하고 있는 이세필(李世弼)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오직 송담서원을 꼭 가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29)
松潭書院 詩
윤증(尹拯, 1629~1714)
金剛直脊走太白
肢股離披滕海水
乾坤軒豁日月明
着眼山河皆信美
齋東野人習迂怪
千載唯知四仙耳
我來行行訪舊跡
慨無一片名敎地
不有松潭廟貌存
誰洗關東一方耻
금강산 곧은 등성 태백으로 달리고
팔다리 떼어져 여기저기 바닷물에 출렁여라
하늘과 땅은 추녀를 뚫고 해와 달이 밝으니
눈여겨보니 산하 모두 진정 아름다운데
시골 사람들 괴상한 것만 익혀
천년이 지나도 안다는 게 고작 사선뿐
내 와서 이곳저곳 옛 자취 찾아봐도
유교의 가르침 있는 곳 없는 것이 한스럽구나
송담서원이 있지 않았다면
관동지방의 수치를 누가 씻어 주었으랴
출처: 「明齋遺稿」 권2, 詩 松潭書院
松潭書院 詩
동토(童) 윤순거(尹舜擧, 1596~1668)
三韓自古名山水
山水尤名東勝東
東關九土並稱美
最近江陵雄且大
九土之美盡在此
栗谷大賢生於斯
信知人傑發異地
舜文亦曰夷之人
濊氏之邦曷足恥
嶽鎮川停旣如彼
鍾英毓秀宜若此
後墅前闊式行人
松潭蘭室參多士
惟新祠廟百世尊
不替馨香千載祠
猶疑坐尊兩檻間
却似藏書重壁衷
海闊天宮度量存
珠藏玉蘊矜懷是
首陽專享亦年所
文廟祭儀他日俟
畢竟斯文天未喪
還敎絃誦傳無己
自吾道東靜退來
譞未有盛於夫子
삼한에는 예부터 산자수명한 곳이 많다 했고
산수는 관동이 더욱 이름나 있네
관동구읍에서 아름다움을 모두 갖추었고
최근에는 강릉이 웅대하고 크니
구읍의 아름다움이 모두 여기에 있네
대현 율곡 이선생이 여기에서 나시고 사문정맥이거늘
인걸이 별다른 곳에서 나겠는가
순임금 주문왕도 이(夷)나라 사람이라 하니
동예의 나라에서 부끄러움을 생각하게 되었다네
산악이 누르고 내가 멈추는 곳 피안(彼岸)과 같으니
지혜롭고 총명한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 마땅하구나
농막 앞에 사당문을 내었더니 행인이 의식을 갖추고
송담난실에 참배하는 선비가 많도다
오직 새로운 사우는 백대 넘게 남도록 존귀하게 여기고
분에 넘치지 아니하는 꽃다운 향기를 지니고 천년 제향을 하도다
용상에 앉아있는 모습, 두 기둥 사이에 앉아있는 자세는
마치 벽 속에 장서를 간직한 것 같다
넓은 바다 신들이 사는 궁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이 존재하며
(자신의 재주와 지혜는) 옥돌이 바위 속에 박혀 있고, 진주가 바다 깊이 잠겨 있는 것처럼 자긍심을 품고
해주(海州)에서 마음대로 제향한지 오랜 세월이 되었구나
문묘에서 올리는 석전대제는 다른 날을 기다려야 한다
마침내 하늘이 어린 유학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교시를 바꾸어 내리니 誦의 덕이 극치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내가 도동에 와보니 후학으로 정암(靜庵)과 퇴계(退溪)가 있어
경이롭다. 공부자의 말씀과 같이 인재가 여러 곳에서 배출되누나
7. 옛 등명사(燈明寺)의 석탑, 등명사지오층석탑(燈明寺地五層石塔)
등명사지오층석탑.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7호
○ 등명사지오층석탑(燈明寺地五層石塔)은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산 7-3 등명(燈明) 낙가사(伽寺)에 있으며, 5층의 석탑이다. 괘방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절은 원래 등명사(燈明寺)가 있던 곳이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의 맨 윗돌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석재의 일부 모서리를 곡선으로 처리하여 부드러움을 주고 있다. 기단 위에는 오밀조밀한 5층의 탑신이 쌓여 있는데, 지붕돌의 밑면의 받침과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 올림이 장식적인 효과와 함께 정적인 탑신에 운동감을 불어 넣어준다. 1층 몸돌에 도드라지게 새긴 감실(불상을 모셔두는 방) 조각은 목탑에서 이곳에 직접 불상을 안치하던 수법이 퇴화된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이 남아있다. 기단부의 구성 및 조각수법, 지붕받침 수, 퇴화된 감실의 표현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폭이 좁고 아담하여 동시대의 다른 조형물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 (문화재청) 등명사지오층석탑(燈明寺地五層石塔)은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었다.
등명사(燈明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불우(佛宇)에 “부(府) 동쪽 30리에 있다”고 하였다. 등명사(燈明寺)라고 한 것은 '새벽이면 붉은 햇살을 받아 밝음'을 뜻하여 이름 지었다. 등명(燈明) 괘방산(掛山)의 산허리에 자리잡고, 동해바다의 파도를 내려다 볼수 있으며, 산·해(山海) 경승(勝)을 겸하여서 양양 낙산사(山寺)를 닮았다고 한다. 창건연대는 자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며, 고려시대 초기에 중건한 절이라 전한다. 등명사지오층석탑(강원도유형문화재제37호) 은 높이 3.5m 정도로 기단석 맨 위에 연화를 조각하였다. 이 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어느 때인지 자세치 못하나 왕께서 안질(眼疾 눈병)이 심하여 약을 써도 낫지 않아서 점장인에게 물었더니 점장이는 말하기를 “동해의 정동에 등명사(燈明寺)라는 절이 있아온데 이 절에서 아침 저녁으로 씻는 쌀뜬물이 바다에 흘러 들어가 동해용궁의 용왕(龍王)이 노 (怒: 성내다)하여 국왕(國王)의의 안질을 심(甚; 정도가 지나치다)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국왕은 특사를 시켜 원산에서 배를 타고 가라고 하였고, 특사는 원산에서 황포돗배를 타고 정동 앞바다에 다달렀을 때 해무로 바다가 흐린 것을 보고 등명사(燈明寺)에 올라 폐사(廢寺; 폐지 해버린 절) 시켰다고 한다. 이로부터 허물어진 절을 중건하지 못하였으며, 1940년 서학수(徐學守) 화상(和尙; 수행을 많이 한 고승에 대한 존칭)이 암자를 짓고 불도를 드리기 시작 하였다. 「강릉의 역사변천과 문화」 그 뒤 1956년 경덕(景德)스님이 옛터에 절을 중창하고 낙가사(洛伽寺)라 개칭하였으며, 1997년 영산전(靈山殿)을 지었다. 1982년에는 청우스님이 극락전 · 약사전 · 삼성각 · 범종각 · 요사채를 건립 하여 오늘에 이른다
등명사(燈明寺)
김돈시(金時, 김부식 둘째 아들 ?~1170)
寺壓滄波遠
登臨如在海中央
卷簾竹影疎還密
欹枕灘聲抑更揚
夜靜經樓香炮冷
月明賓楊葛巾涼
堪嗟好景無緣住
終日昏昏為口忙
절이 창파를 눌러 멀리 아득한데
올라보니 바다 복판에 떠 있는 듯하다
걷으니 대나무 그림자 성글면서도 빽빽하고
베개에 기대니 여울소리가 낮았다가 높다
경루에 밤 고요한데 향불이 싸늘하고
객탑(客楊)에 달 밝은데 갈건(葛巾)이 서늘하다
경치에 머물 인연 없음이 못내 서글퍼 좋은
정신없이 구복(口腹)위해 바쁘다.
출전, 동문선(東文選, 1478), 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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