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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강동면 관련 도서 서적 (강릉, 강릉인, 강릉의 얼)

강다방 2023. 9. 12. 15:03

 

 

 

 

강릉, 강릉인, 강릉의 얼
저자 이성실
강원도민일보사

 

 

 

 

 

11. 우리 고장의 선현을 모시게 되는 송담서원(松潭書院)

■ 지정번호 : 지방유형문화재 제44호
■ 소유자 : 강릉유도회
■ 소재지 : 강릉시 구정면 언별리

* 언별리는 본래 구정면이었으나 1938년 강동면에 편입됨


문성공(文成公) 율곡 이이(李珥)를 제형하는 서원으로서 서원의 처음 이름은 석천서원(石川書院)이다.

 

 

 

 

1624년(仁祖2) 강원감사 윤안성(尹安性), 강릉부사 강인(姜絪)과 강릉인 공조참의 김몽호(金夢虎)원장, 이상필(李尙) 등 지방인사 30여 명에 의해 기공되고 6년의 공사 끝에 1630년(仁祖8)에 완공을 보았다. 이 해 강릉 유생 최언침(崔彦琛) 등이 조정이 인정하는 서원으로서의 자격을 얻고자 사액신청을 올렸으나 승낙을 받지 못하였다. 1652년(孝宗3) 강원감사 김익희(金益熙)와 강릉부사 이만영(李榮) 등이 협의하여 새 건물을 짓고 처음에 세웠던 학산리 왕고개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 때의 건물규모는 문우(사당) 6칸, 월낭 7칸, 동·서재, 각3칸, 강당 10칸, 서고 3칸 등으로 웅장한 서원 모습을 갖추었었다. 그 후 강릉 유생 김수(金洙) 등이 다시 사액(賜額)을 신청하여 1660년 (顯宗1) 마침내 송담서원(書院)이라 명명(命名)한 원액(元額)을 하사받았다. 이때 조정에서는 사액과 동시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서원제례의 예를 올리게 하기도 하였다. 송담서원의 묘정비(廟庭碑)는 1726년 영조조(英祖朝)의 영의정 정호(鄭)가 글을 짓고 우 의정 민진원(閔鎭遠)이 쓴 글씨이다.

이렇게 위용을 자랑하던 서원이 1804년(純祖4)에 큰 산불로 30여 칸의 서원 대부분이 타버리고 오직 사당만이 온전하였으며 이곳에 보관되어 오던 율곡의 귀중한 친필 유물과 인경 등 많은 소장품들이 함께 소실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때 사당에 모셨던 위패(位)는 원장 신석노(辛錫魯)가 불길을 무릅쓰고 모셔내어 사무실앞 안인천 물속에 들어가 무사하게 하였다. (안인천은 지금 단 경골에서 내려오는 송담서원 앞 내를 의미한다)

그 후 지방유림이 주창하여 전국적 모금운동을 벌여 강당, 장경 작, 광운루 등 원래의 모습으로 중건하였으나 1871년(고종 8) 사액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다.

 

 

 

 

 

 


1905년(고종42) 봄 지방유림의 모금으로 원 서원 자리에 묘우를 다시 짓고 매해 음력 2월 중 정일(丁日)에 다례를 올리고 있다. 현묘우 액판 송담재(松潭齋)는 해사(海)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다.
(이상 구임영지 임영문화 제5조 서원조 참조)

오봉서원과 송담서원의 건립 연대 차이는 75년 차이가 난다. 송담서원 완공 연대는 1630년이고 율곡이 세상을 떠난 해는 1584년 이니 율곡 별세 46년 뒤에 송담서원이 세워졌다. 오봉서원은 율곡이 별세하기 28년 전이다.

그리고 오봉서원에 송시열 영정을 모신 해는 1813년이니 이때는 율곡이 세상 떠난 지 229년째가 된다. 송시열은 이율곡 학맥의 후배이다. 이렇게 볼 때 오봉서원이 당초 공자 초상과 퇴계, 주자, 송시열 등을 모시면서 정작 강릉이 낳은 대현 이율곡은 어찌하여 예외로 하였을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향리가 낳은 대유학자요, 경세가인 이율곡을 제향하는 서원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해주의 최충이 나 백운동서원(후일에 소수서원(紹修書院순흥)이 지방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제향한 것처럼 이 지방에도 그에 못지 않는 대유학자 이율곡을 제향하는 서원을 건립하겠다는 지방유림의 자존심은 오봉서원을 능가하는 서원 건립의 의지로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 심지어 사액관이 파견되어 서원제례의 예까지 올리고 갔 다는 것은 대성황이 아닐 수 없었다고 보아진다. 그만큼 조정에서는 송담서원의 당위성을 높이 평가했다는 증좌라 할 수 있다.

역시 강릉은 이율곡의 탄생지답게 율곡의 기맥을 답습하는 것으로서 지금까지 매년 음 2월 중정일(中丁日)에 다례를 중단 없이 올리고 있다는 전통이야말로 숭례훙학의 전통고장의 상징적 향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상을 통해 인권을 존중하고 모든 영역에 종사하는 우수한 능력을 존중하여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기풍이 다져지는 것이다.

이상으로서 우리고장의 문화유훈을 찾아나선 발길을 멈추기로 한다. 이 밖에도 미련과 유혹의 발길이 가려는 곳이 많으나 일일이 세세한 곳까지 독자를 모시기 민망스러워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그러나 종합적 후담을 빼놓을 수 없어 돌이켜보면 우리고장의 문화양식(文化良識)이 이처럼 풍요한가 하는 점에 새삼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오봉서원(五峰書院)의 설립이 논의되던 1553년 경에는 강릉에 품관(品官), 즉 벼슬하는 사람이 70여 인이나 되었다는 명종8년(明宗) 계묘조(癸卯條)의 기록을 박양자(朴洋子) 교수는 그의 「오봉서원」 논고에서 소개하고 있다. (임영문화 제17집)

이러한 근거로 미루어 볼 때 이미 그 당시에 흥학숭례의 풍토와 수준은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이렇게 왕성하고 높은 수준은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일 뿐 아니라 초시에 합격하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는 사실도 위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강릉인이 얼마나 학문과 문화와 윤리도덕을 진흥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명제와 특히 남북통일이라는 난사 앞에 직면하고 있다. 과거 민주주의 주도세력은 민주주의적 영역론에서 모든 것을 해석하려 하였고 경제발전 주도세력은 경제발전론 범주에서 모든 것을 진보시키려고 했다.

이 두 주체들은 서로를 홀시했다. 그러나 극단적인 경향은 서로를 포용하여 새로운 등식을 창출하지 못한 까닭으로 우리는 모두 를 다 잃는 위험한 지경에까지 왔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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