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물, 소설
당신의 계절이 지나가면, 주얼
1년 12개월처럼 12개의 단편 소설이 들어있는 책. 1인칭 나의 시점으로 적힌 글이 많아 에세이처럼 술술 읽힌 단편 소설 모음집입니다. 소설 배경으로 옆 동네 삼척이 나와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계절이 지나갈 때 읽으면 더욱 좋은 책.
제목 : 당신의 계절이 지나가면
저자 : 주얼
펴낸곳 : 이스트엔드
제본 형식 : 종이책 - 무선제본
쪽수 : 237쪽
크기 : 135x200mm
가격 : 12,000원
발행일 : 2022년 1월 1일
ISBN : 979-11-977460-2-4 (03810)
작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eastend_jueol/
당신의 계절이 지나가면
주얼 단편소설
기회가 된다면 글을 써보고 싶어요.
제가 지금까지 겪은 것, 느끼고 생각한 것,
그리고 앞으로 마주해야 할 것에 대해서요.
「about jewel」 중에서
자전적 경험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담담하고 차분하게 그려 낸, 기억과 일상에 관한 12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 주얼 작가의 첫 작품집
당신의 계절이 지나가면
제가 여기 있으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삶의 모든 모습이 선명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이 잘못된 건 아니고,
우리는 충분히 살아갈 수 있죠.
저는 이제 그렇게 믿게 되었어요.
「삼척에서 온 편지」 p.117
당신의 지나간 계절도
고요히 반짝이는
이야기가 되길 바랍니다.
주얼
삼척에서 온 편지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적혀있는 발신 주소는 강원도 삼척시로 시작되는 '수산나의 집'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하지만 주소를 적은 익숙한 글씨체를 보고 나는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이 연수란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아마도 내가 사는 집의 주소를 모르니 회사 주소로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썼다가 회사의 누군가 아는 사람이 보게 되면 내가 괜히 난처해질까 봐 일부러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연수는 2년 전 우리 부서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오면서 나와 만나게 되었다. 그보다 3년 선배였던 나는 그의 파트너로 지정되어 그에게 업무를 가르치고 함께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공무원을 준비했었지만 여의치 않게...
제가 회사를 그만둔 지도 거의 6개월이 지났습니다. 분명 짧은 시간이 아닌데 불과 얼마 전까지 회사에 다녔던 건 아니었는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때의 기억은 이미 희미해져 버린 것 같은데 말이죠. 선배님은 계속 회사에 다니고 계시겠죠? 이제 입사한 지 4년이 넘었으니 대리로 승진을 하셨을지도 모르겠군요. 혹시 그렇다면 편지로나마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지금 '수산나의 집'이라는 요양 시설에 있습니다. 봉투에 적힌 주소를 보셨겠지만, 이곳은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이란 곳에 있어요. 삼척이라는 곳도, 거기에 있는 미로면이란 곳도 저는 처음입니다.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이곳에 오는 일이 거의 없을 거 같습니다. 이곳은 주변에 특별한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삼척 시내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주위에는 산밖에 없는 아주 조용한 마을이니까요.
이곳 미로면이라는 지명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상했었는데 계속 듣고 말하다 보니 입술을 작고 둥글게 벌려 말해야...
"너 내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알아?"
"갑자기 그건 왜? 하영? 글쎄. 무슨 뜻인데?"
"여름 하에 노래할 영, 여름을 노래한다는 의미야. 할아버지가 지어 주셨는데, 할아버지는 여름이 가장 생기 넘치고 건강한 시기라고 생각하셨나 봐. 그러한 여름을 노래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기 있고 건강하게 살길 바라셨던 거지. 12월에 태어난 아이에게 말이야. 재밌지? 어쨌든 내가 갑자기 이름 얘기를 왜 했냐면, 생각해 보니까 이 이름이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는 과연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어떤 것일지 궁금해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 앉고 두 손 을 테이블 위에서 마주 잡으며 대답했다.
"난 작가가 될 거야.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는 일러스트 작가 말이야.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들을 나의 글과...
그녀가 부러웠고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은 정말 연애에 관심을 가질 틈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순간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빨리 너의 작품을 보고 싶다. 정하영 작가가 어떤 것을 노래할지 궁금해. 너라면 분명 멋진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지금 구상 중인 작품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너에게 가장 먼저 보여줄게. 너라면 분명 좋은 조언을 해줄 것 같아.”
그녀의 대답이 나는 기뻤다. 비록 내가 그녀의 남자 친구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좋은 친구로서 작품을 함께 공유하고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를 정말 좋아했고 그녀와 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와 계속 함께이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매우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그 꽃가루가 사람의 혀를 완전히 마비시켜 영원히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봄바람에 날려 떠다니던 꽃가루가 입속으로 들어가 혀에 묻게 되면 그 자리에 곰팡이와 비슷한 하얀 균사가 생성된다. 그리고 이 균사에서 만들어 내는 독성 성분이 혀를 서서히 마비시킨다. 완전히 마비된 혀는 다시는 움직일 수가 없게 되고, 결국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되고 만다.
하지만 꽃가루가 혀에 묻은 뒤 균사가 자라 혀를 마비시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꽃가루가 입속에 들어와 혀에 묻는다고 해도 오랜 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거나, 음식이나 물을 오랫동안 섭취하지 않거나, 아니면 양치를 안 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벙어리 덩굴나무의 꽃가루에 의해 사람의 혀가 완전히 마비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정말 무섭고 두려운 식물인 벙어리 덩굴나무를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간다.
-「세상의 희귀 식물 사전」 中 '벙어리 덩굴나무'편에서
***
진행자가 북 콘서트 시작을 알렸고 그녀는 자신의 책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청중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조곤조곤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그녀의 말투와 목소리도 그대로인 듯했다. 말을 하는 동안 반짝이고 있는 그녀의 눈을 보니 자신이 좋아하고 흥미 있어 하는 것에 관해 반응할 때 큰 눈이 반짝거리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고 흥미 있어 하는 것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중일 거라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갑자기 알 수 없는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10년 전보다 나만 나이가 들고, 나만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때 그 시절 이후로 서로 다른 시간의 속도를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니가 앞으로 원하는 건 뭔데?"
함께 술을 마시던 죽마고우 친구는 내 고민을 듣더니 대뜸 이렇게 물었다. 내가 원하는 건 도대체 뭐냐고. 그건 나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면서 대답하기 제일 어렵고, 제일 짜증 나는 질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비록 계약직이긴 했지만, 연구원으로 취업이 결정됐던 1년 전엔 이제 나도 어엿한 일자리를 구했다고 생각했다. 1년이라는 계약 기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분명 문제 없이 갱신 될 거라고, 그리고 그렇게 갱신되다 보면 곧 정규직 연구원도 될 수 있을 거라고 순진하게만 생각했다. 그랬었기에 앞으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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