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깎던 노인
벌써 2년 전 일이다. 내가 국내 여행에 갓 눈을 떠 이곳저곳을 여행할 때다. 바다를 보기 위해 일단 강릉역에서 일단 KTX를 내렸다. 강릉역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책을 쓰는 노인이 있었다. 강릉을 여행할 때 참고나 하려고 강릉 여행 가이드북을 한 권 부탁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책 한 권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만들어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책을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쓰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 보고 저리 돌려 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쓰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버스 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쓰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쓴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버스 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써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책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쓰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쓰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인쇄한 책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책이다.
버스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강릉역 맞은편 화부산 정상을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선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책을 꺼내놨더니 주변 여행자들이 책 내용이 알차다고 야단이다. 인터넷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올려져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나는 인터넷에 찾을 수 있는 정보나 서점에 있는 여행 책과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여행자의 설명을 들어 보니, 인터넷에는 광고 글이 너무 많아 참고하기 어렵고, 종이책이 너무 무거우면 가지고 다니기 힘들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처럼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책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중앙시장에서 파는 닭강정에 맥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화부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산 정상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책을 쓰다가 유연히 산 정상에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도연명(陶淵明)의 싯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갔더니 어떤 여행자가 프린터로 인쇄를 하고 있었다. 전에 기차 시간표를 프린트했던 순간이 생각 난다. 프린터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인쇄 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만호도의성(萬戶擣衣聲)이니 위군추야도의성(爲君秋夜擣衣聲)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몇 년 전 책 쓰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책 깎던 노인이 쓴 화제의 그 책, 독립출판물 <강다방 여행 가이드 강릉 2020> 소개, 구매처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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