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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강동면 관련 도서 서적 (강릉의 민속문화)

강다방 2023. 9. 19. 15:46

 

 

 

 

강릉의 민속문화
장정룡 편저
대신출판사

 

 

 

 

7) 왕의 안질과 정동 등명사

신라 때, 언제인지는 모르겠고, (거기에)탑도 있었고 승려가 백명 넘게 있었다구던요. 한 번은 신라 때 왕이 눈에 삼이 세 가지고 아무런 약을 다써도 효과를 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누구한테 물었거든요. 점을 하니까 여기서 정동 쪽에 뭔 절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쌀을 씻으면 쌀 뜬물이 바다 에 들어간다. 그래서 임금이 삼눈이 셨는데 그것만 없애믄 병이 낫는다 이기야. 그래서 나라에서 고만 불을 콱 질러 없애버렸단 말이요. 그래 임금의 병이 나았다 해요.

4. 수로 전설과 강릉  ⁸⁾

1) 전거분석
獻花歌라 불리는 鄕歌는 海歌와 함께 「三國遺事」紀 第二.水路夫人條에 수록되어 있다. 全文은 順庵手澤本을 底本으로 하고 각종 異本을 참고하였다.

8) 張正龍, “新羅鄕歌 獻花歌의 背景論的 考察"「井山 柳穆相博士 華甲紀念論叢」 1988, pp. 525~550. 일부 전재.

 

 

 

 

 

 


이상에서 보인 바와 같이 順女的으로 構造를 분석한 결과 序話와 속에는 2개의 說話와 2개의 歌謠가 들어 있으며 前者는 解決의 結果로 노래가 나왔고 後者는 노래를 통하여 해결을 보고 있는 점이 다르다. 그러므로 前者는 꽃을 주제로 집약된 叙事形態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면 後者는 •呪術的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하겠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
序話→발단→전개→고난→해결→가요
- 獻花歌 -
......
2일
발단→전개→고난→가요→해결→終話
- 海歌 -
- 水路夫人 -

 


2) 헌화가와 화비령

獻花歌의 肯景說話에 나타나기로는 純貞公이 新羅 聖德王代(서기 702~736)에 江陵太守로 부임하고 있다. 太守는 신라때 지방 각 郡의 으뜸 벼슬로, 重阿飡에서 舍知의 官階 6~13등급 지위인데 太守가 갈리어 돌아갈 때는 반드시 말 8필을 준다하였으니 그 행차는 성대했다고 생각된다.

純貞公이 누구인가는 찾지를 못하였는데, 江陵府使 人名薄인「先生案」에도 新羅時代에는 異斯夫(智證王代, 서기 505년 재임)와 眞珠(聖德王代, 서기 639년 재임)만 기록되고 바로 高宗 때 林民庇부사(서기 1147년 재임)로 넘어가 純貞公이 太守로 왔었는가는 진위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와 함께 수행한 水路夫人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쓰여졌으므로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新羅 善德王 8년(서기 639년)에는 현재의 江陵땅 何瑟羅州에 北小京을 두어 沙湌 眞珠를 하여금 鎭住하게 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도인 慶州와는 東海岸을 통하여 반반한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夫人에 대한 이야기가「三國遺事」의 紀異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도 一然 自身이 평범한 이야기로 간주하지 않았음이 看取되나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계속될 여지를 갖고 있는 상징성이 농후함이 문제라 하겠다.

9) 「高麗史」列傳 卷 第34, “昇平故事 每太守替還 必贈馬八匹...”
10) 方東仁, “䄙州都督 置潑小考”「臨瀛文化」第3輯(江陵:江陵文化院, 1979) p.28에는 “小京이란 特殊行政區域으로서 이곳에 征服地域의 有力者들을 이주시킴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세력의 성장을 전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慶州貴族들의 子弟와 富豪한 백성들이 이곳에 이주함으로써 이들에 의해 地方文化가 꽃피게 되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獻花歌와 梅歌가 典據分析한 바에 의해서도 밝혀졌듯이 呪術性을 갖고 있음이 미약하게나마 파악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배경론적 考察로 原文에 충실하여 가능성의 전제하에 江陵地方과 연관하여 논하고자 한다.

獻花歌는 꽃을 바치는 노래이다. 그러나 단순히 꽃을 바치는 노래가 아님을 여러 논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필자는 여러 차례의 답사를 통하여 江原道 溟州郡 安仁津과 正東津에 이르는 火飛嶺 근처를 의심하고, 安仁津의 梅靈祠와 水多寺로 불린 燈明洛迦寺의 傳承說話와의 相關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자 한다.

獻花歌의 第一甸는 “布岩乎希"로 "자주빛 바위가에”로 譯하고 있다. 이중 ‘紫布’는 ‘딛배'로 읽어 濃紫色의 뜻으로 쓰인다. 「江陵府誌」의 기록에 의하면 飛嶺을 특별히 “...土色如焦故名之”라는 유래로 설명하고 있는데 紫岩으로 된 海岸에 근접한 고개임을 조사로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단순히 土色의 동일함으로만 가지고 추정하기에는 미흡함을 버릴 수 없다. 「江陵府誌」와「臨瀛誌」에는‘要害之處'또는 '要衡處也'라고 했듯이 난간과 같이 험한 南江陵과 慶州 사이의 위험한 지역으로는 火飛X을 꼽았다. 그래서 說話속에도 “傍有石暲如屛臨海”라 했으며 이 부근에서 X貞公 行X는 '海汀晝餞'을 하였다. 여기서 畫X은 지금까지 '점심을 먹었다'는 정도로 해석하였는데, 金光淳 교수는 임금의 음식이나 神의 祭物을 나타낸 것으로 사용된다며 반론을 폈다. 필자 역시 단순히 점심을 먹었다는 내용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이는 본문에 晝饉이 두 차례나 나오고 餅으로 기록된 내용에 “七寶宮殿 所饉甘滑香潔 非人間煙火”란 것으로 미루어도 짐작된다. 山神에게 險路의 安全을 비는 꽃의 XX이 아니었을까?

꽃의 象徵性으로 구성된 江陵民X '山XX'는 음력 4월 15일 迎神時 부르는 神遊의 노래다. 이는 꽃과 迎神과의 관계를 말해 준다.

꽃밭일레
꽃밭일레

四月보름날에. 꽃밭일레
지화자 지화자 영산홍

11) 梁柱東,「朝鮮古歌硏究」(서울:博文書館, 1942), p. 196.8
12) 「江陵府誌」關阪條 “自府南三十五里 大關嶺南麓支分 南走起於海上土色如熊故南路要害之處”「東國輿地勝覽」卷44,江陵條 “飛峴 在府南三十五里嶺土黑如火所燒故名”

 

 

 

 

 


영산홍 봄바람에
가지가지 꽃피었네
지화자 지화자 영산홍 13)

兜率歌에서 꽃은 散花功德이 의미하는 供物의 성격으로 超越的 세계와의 매개물로 쓰여졌듯이 山遊歌는 江陵鶴山里의 민요 '영산홍'이 부락전설의 神話上昇으로 인하여 迎神歌로 불려지고 있다. 이는 X旨X 迎神歌의 형태를 닮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大關嶺에는 山神과 城隍神을 모신 堂이 있는데 下降的 神話體系를 갖춘 神槍으로 降神茴를 택하여 노래와 춤, 假面X 등으로 娛神을 하는 과정에서 山遊歌는 神歌로 상승되었다고 하겠다. 獻花歌의 경우도 이러한 절차를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꽃의 상징성이 迎神의 媒介物로 供物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꽃을 중심으로 水路夫人과 老翁과는 어떠한 관계인가를 살펴 보기로 하자.

水路夫人과 老翁은 한 마디로 제안자와 해결자의 관계인데 이는 꽃이라는 상징물로 연계되어 있다.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 준 이는 神이며, 그것은 꿈에서의 일이다. 이렇게 꿈에서 꽃을 꺾어 달라는 것은 神에 대하여 再生을 希求하는 강력한 표현이며 사랑의 갈구라는 설명에 의해서도 꽃의 상징성이 암시된다. 그러나 꽃의 含意를 ‘異代의 男性’또는 ‘未知의 男性'으로 보는 관점에는 쉽게 同意되지 않는다. 이는 上記의 영산홍에서도 살펴졌듯이 迎神的 의미로 보는 해석이 老翁과 연결될 때 선명해진다. 꽃을 사랑 또는 해(日)'로도 보고 있듯이 超俗性을 갖고는 있다. 老翁을 原文에는 “其翁不知何許人也”라 하였다. 왜 이와 같이 기록하였는가는 앞의 꽃이나 바위, 소가 神話素的 生生力의 대상임을 인식할 때 해석된다. 그의 正體에 대하여 여러 설로 나뉘나 “超人的 才質을 갖춘 神格的 人物” 이라는 데는 동의하는 경향이다.

“不可能을 할 수 있는 能力의 所有者인 암소를 끌고가는 老人은 世俗의 人間

13) 任東權,「江陵端牛祭」(重要無形文化財 指定資料,文化財管理局, 1966), p. 42. 張正龍,「江陵官奴假面戲硏究」(碩士學位論文,中央大大學院, 1981), p. 98. 14)張正龍, 上揭書, pp. 102~103 참조.
15) 英姬, "古代人들에게 反映된 꽃의 意味”「亞細亞女性硏究」第11輯, p. 3.
16) 南, "三國遺事 水路夫人條 散文記錄의 分析"[語文學報」第4輯, p. 47. 17) 李御寧, 「韓國人의 神話」(서울:瑞文堂, 1979), p. 103.
18) 金學, 「新羅佛教文學硏究」(서울:玄岩社, 1977), p. 276.

 

 

 

 

 

이 아니다." 19)

"여기 늙은이는 예사 늙은이가 아니요 신선이 분명하다." 20)
“佛仙에 道通한 聖人이요, 사랑呪詩를 읊을 수 있는 創造人이요 呪術師인
듯... 21)
“龍神의 化身인 牧牛之士라는 存在나 性格" 22)
“이 헌화가를 지은 늙은이는 결코 속세의 평범한 영감님이 아니요, 어쩌면 山신령이거나 물귀신이었을 것이다." 23)
이 老翁을 觀音變身으로 보는 것이 더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24)
신화상의 인물 25)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XX한 사람', '늙은 노인'. '향가를 몸에 익힌 老齡의 어느 사람', '微賤한 늙은 地方村老', '農民의 상징적인 人物'등 으로도 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현실적 인물이 아니면 신화 人物로 보느냐 하는 두 가지의 태도로 나눌 수 있겠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說話의 문맥에서나 詩的 구조상 그가 어떤 의미를 갖추고 있는가를 찾아야 하고 그 象徵性이 해석될 때 분명한 인물로 顯X되기 때문에 누구인가의 문제보다 무슨 기능을 가지고 있느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본다. 이는 海歌에 나타나는 '又有一老人'과도 연관되기 때문이다.

상기 서술의 老翁과 相對的 개념으로 나타나는 水路夫人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다. 水路夫人을 精神醫學的인 측면에서 살핀 결과 精神疾患의 持病者로 보기도 한다.

“그는 아름다운 용모에 比하여 殘忍한 人性을 가진 괴팍한 女性으로 看儆된다. ...바닷가에 높이 솟은 너설바위의 척촉화를 꺾어 가지려는 貪心을 充足시키

19) 申東旭,「文學의 解釋」(서울:高麗大出版部, 1976), p. 16,
20) 金琪, “곶받틴노래”「現代文學」153號, p. 307.
21) 金鍾雨,「鄕歌文學硏究」(서울: 三友社, 1976), p. 31.
22) 洪在杰,前揭書 p. 274.
23) 李相寶,「韓國古詩歌의 硏究」(서울:螢雪出版社, 1975), p. 402.
24) 金雲學,「新羅佛教文學硏究」(서울: 玄岩社, 1977), p. 243.
25) 崔喆,「新羅歌謠硏究」(서울:開文社, 1979), p. 259.
26) 李明善,「朝鮮文學史」(서울:朝鮮文學社, 1948), p. 58.
27) 金東旭,「韓國歌謠의 硏究」(서울:乙酉文化社, 1965), p. 31.
28) 李能雨,「古詩歌論攷」(서울:宣明文化社, 1966), p. 363.
29) 尹榮玉,「新羅詩歌의 硏究」(서울:螢雪出版社, 1982), p. 171
30) 金學成, “三國遺事 所載說話의 形成 및 過試[冠岳語文硏究」第2輯, 서울大國文科, 1977, p. 213.

 

 

 

 

 


기 위하여 獻花를 墾하는 것은 그의 沒人情을 端的으로 드러내보여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欲求가 充足되지 못할 때나 環境이 急變하면 心的 衝擊을 받아 症狀動作 發作되는 女人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1)

상기의 긴 引用에서 꽃을 꺾어 가지려는 貪心을 殘忍性으로 볼 수 있을까 의문이다. 說話에는 두 가지 원형의 틀이 있다고 보는데, 架空性과 現實性 즉 神話的 世界와 현실적 문맥으로 二重性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獻花歌의 모든 의미는 水路가 요구한 꽃을 중심으로 구축되므로 꽃이 가진 原型象徵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說話的空間과 상징성이 詩的 긴장으로 凝結 되었다고 본다.  X蜀花가 사람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開花하였다는 空間性은 非日常性과 超現實的 공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한 상황은 神聖性도 가지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高干丈의 높이에 피어 있는 꽃을 바라는 마음은 牽牛老翁의 손을 놓게 한다. 아니면 老翁의 神的 許諾을 요구한 제안일 수 있다. 이는 老翁이 앞에서도 규정된 바 있듯이 神的 人物로 나타난다고 할 때 苦難을 해결시켜 주는 비범속성을 갖춘다는 점이며, 그 世俗의 인물과 세속의 世界와를 접속하게 한다.

꽃을 꺾어 주겠다는 뜻은 “나를 아니부끄러워 하신다면”의 전제하에 이 루어진 가정법내의 직설법 (Indicative Within-Subjunctive)의 상황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꽃을 꺾는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뜻을 神이 感應했다고 봄이 타당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로써 現實的 畫餞과 神話的 狀況 신화적 상호성. 꽃이라는 媒介의 折花作業으로 연결되어 聖(Sacred)과 俗(Profane)의 거리를 좁히고 있다고 본다.

다음은 水路夫人을 巫堂 혹은 巫的 女人으로 보고 있음인데, 安英姬 교수는 女巫들의 사례를 덮고 그가 사이라는 결론을 말했으며, “그에게는 현실의 理나 事實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뒤에 숨어 있는 어떤

31) 洪在烋,前揭書, p. 272.
32) 尹榮玉, 「新羅歌謠의 硏究」(서울:螢雪出版社, 1982), p. 170. 에는 “아름다운 꽃을 美女 水路가 貪했다는 것은 너무나 正常的인 欲望이다”라고 설명한다.
33) 李在銑, “新羅歌謠 語法과 修辭"「新羅鄕歌의 語文學的 硏究」(서울:西江 大, 1972), p. 177. 에는 “조건을 전제로 한 결과로서의 가정법에 의해 직설된 이른바 가정법 내의 직설법의 상황이다”라고 하며 詩歌文脈上으로 보아 실제로 꽃을 꺾어 바친 것은 아니라고 했다.
34) 姬, “古代人들에게 反된 꽃의 意味”「亞細亞女性硏究」第11輯(서울: 淑
明女大, 1982), p. 191.

 

 

 

 

 


孤高하고도 장엄한 큰 힘을 얻음에 고민한 巫的女人이었다"고 한 金鍾雨 교수의 이야기도 水路夫人 설화를 水路 自身의 神異함에다 모두 맞추고 있는 점이 보인다. 그러나 水路는 老翁이나 老人으로 표기된 人物에 의해 救援되고 불가능을 成就하는 처지이므로 다음과 같은 도표 설명이 가능하다.

水路(平凡) ↔ 꽃(媒介) ↔ 老翁 (非凡)
水路(平凡) ↔ 거북(媒介) ↔ 老人(非凡) 

또한 水路夫人과 老翁 사이는 晝鐥을 통하여 만난 현실과 神異, 世俗과 神聖의 관계이며 說話構成의 긴요한 대상으로 설정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聖俗의 개념으로 살펴본다면, 水路와 老翁의 사이에는 俗이라는 현실적 상황속에 聖이라는 神話的 文脈이 揷入된 것으로 獻花歌는 水直的神話素가 들어 있는 降臨形 神歌로 생각되고, 이에 反하여 海歌는 水平的 神話素를 가진 入水形 祭儀歌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도표 설

그러면 老翁이 잡고 있던 '암소'는 어떤 象徵性이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趙載勲 교수는 첫째 神, 둘째 佛道를 닦는 修道 心牛, 셋째, 隱者의 마음으로 나눈 바 있다. 獻花歌의 2旬에는 放教遣이라 하여 母牛로 되어 있고 說話에는 牛라 하였다.

XX東 교수는 '母'의 母가 訓으로 '엄·암'이고 이는 '곰>옴)암'으로 音轉하였으므로 原初形은 (神)과 一致하여 神母라 하였다. 이는 朴智弘 교수가 龜旨歌의 龜를 금의 鄕札로 본 것과 같이 梅歌와도 통할 것으로

35) 金鍾雨,「鄕歌文學硏究」(서울:三友社, 1976), p. 165.
36) 趙載, "古代文學에 나타난 動物象徵攷”「公州師大論文集」第8輯,1970. P.16.
37) 梁柱東,前揭書, p. 212.

 

 

 

 

 

 


본다. 金善琪 교수는 암소를 不滅永生의 상징으로 높은 Symbolic Value를 가지고 있다며 道의 死神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老翁과 母生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事例로 黃海道
長淵地方 風俗을 살피기로 하겠다.

黃海道 長淵地方에서는 舊正月15日 아침부터 마을 青年들이 山쪽과 海邊쪽으로 갈라져 윷놀이를 하여, 山쪽이 이기면 山의 農事가 豊年이 들고, 海邊쪽이 이기면 海邊農事에 豊年이 온다고 한다. 윷놀이가 끝나면 젊은이들은 마을의 廣場 밖에 나와서 移秧劇을 한다. 그 劇의 進行中 미리 選拔된 山神役의 사나이가 암소를 거꾸로 타고 儒冠道袍의 扮裝으로 山쪽에서 내려온다. 그러면 青年들은 山神을 맞이하여 歌舞한다. 山神은 소 등에 X乘한 채로 悠悠히 둘레를 돈다. 山神이 된 사나이는 이 날 하루동안 神과 같이絕對的 尊敬을 받으며, 손위 사람 이나 老人도 山神에 대해서 不敬스런 말을 쓸 수 없고, 山神도 또한 어떤 사람 이라 할지라도 허리를 굽혀서는 안된다. 40)

상기의 事例에서 우리는 산과 바다의 對應과 豫占豊, 그리고 암소와 山神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金宅圭 교수는 內農作原意로 해석하고 있는데 筆者는 이보다도 來往神으로서 山神과 암소의 性格을 究明하는 좋은 報告로 생각하고 싶다.

山神과 연관하여 江陵地方의 文獻에 보이는 기록들을 검토하여 獻花歌의 本意를 파악하고자 한다.

앞에서도 다루었듯이 「臨瀛誌」에 나타난 火飛巔의 모습이 南走起於海上 色如雋'와 같이 특이한 것으로 獻花歌의 '紫布岩乎'와 연관되고 더우기 火飛嶺‘大關嶺南麓支分'이라는 설명으로 미루어 大關嶺의 山神信仰과 연계시킬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는 꽃의 상징성을 통하여 獻花歌山의 交涉이 民謠上昇으로 迎神的 祭儀歌謠로 발전단계를 밟았을 것이라는 假定이 成立된다면 來往神格의 山神信仰과 그 歌謠로, 老翁과 母牛,獻花 歌의 관계를 모색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38) 朴智弘, “龜旨歌硏究”「국어국문학」 16집, 1957, p. 2.
39) 金善琪,前揭書, p. 325.
40) 難波專太郎,「朝鮮風土記」上卷, 1942, p. 299.
依田千百子, “朝鮮農耕儀禮”「民族學硏究」23 3號, p. 124.
金宅圭,'韓國人의 農神信仰과 演戲'「韓國民俗文藝論」(서울:一潮閣, 1980),
金宅圭,「韓國文化史大系」IIV. 風俗藝術史 1970, p. 654. P. 103.

 

 

 

 

 

「고려사」에 기록된 '大峴設祭以禱'의 내용이나 "大關山神塔山記載의 기록, X江이 기록한 嶺東民俗中 3, 4, 5월에 擇日하여 '迎巫以祭山神'했다는 내용, 그리고 許筠의 大嶺山神贊並序, 「臨瀛誌」風俗條) 내용 등을 배경으로 본다면 이 지방에서 山神信仰은 일찌기 分布되어 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老翁을 山神의 개념으로 규정할 때 암소는 趙교수의 논고에 따라 서 '소는 農家의 祖上'이라는 俗談이나 꿈에 본 소를 祖上으로 解夢하는 경우와 같이 神聖視한데서 온 것과 더욱이 암소가 生産性을 最高의 理想으로 생각하던 農耕社會의 要請에 의하여 샤만教徙間에 totem 아니면 그와 類似한 崇拜의 對象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正月 上元에 행해지는 慶南 靈山쇠머리대기나 豊基의 倒騎黑牛風俗이나, 山의 精靈이 소가 되어 孝子를 도와주었다는 日本傳說의 例나" 하느님의 使者 혹은 神의 可視的인 肉體라는 생각과 中國의 神農氏가 牛頭人身의 모습이라든가 「易經」에서 “乾爲馬坤爲牛”(第8章) “乾天也故稱乎父坤地也故稱乎母”(第10章) “坤爲地爲母爲布爲釜爲客沓爲均爲子母牛...”(第11章)라 했음을 보아도 땅과 母의 관계는 긴밀하다.

결론적으로 獻花歌는 山間地方의 꽃노래 형태 民謠가 山神信仰과 XX면서 祭儀歌謠로 上昇作用을 일으켜 4句體 鄕歌로 定着된 것이 아닌가 疑心되며, 그 背景으로는 江陵 大關嶺 줄기인 火飛嶺 일대를 推定하게 된다.


3) 해가와 안인진

小路夫人 說話에 내포된 海歌에는 海龍과 老人이 登場됨은 앞에서도 언

41) 「高麗史」列傳 卷5, 王順式條 “...太祖謂順式曰朕夢見異僧領甲士三千而至翼日 鄉率兵來助是其應也順式曰臣發溟州至大峴有異偶同設祭以禱上所夢者必此也”
42) 「江陵府誌」卷2,"大關山神塔山記載,王順式從高麗太祖南征時僧俗 二神兵來求文覺而戰捷故于大關至于今致祭”
43) 「秋江冷話」“嶺東民俗每於三四五月中擇日迎巫以祭山神...”
44) 「惺所覆誣藁」“武癸卯夏余在俱州州人將以五月吉迂大嶺神...”
45) 「臨誌」“江原則享祀外別有異者每年四月十五日本府時任戶長領率巫覡詣大關嶺上有神禍一間”
46) 李基文,「俗談辭典」(서울:民衆書館, 1962), p. 306.
47) 洪錫謨,「東國歲時記」上元條 “豊基俗上元日邑首吏倒騎黑牛抱琴而入衛庭拜干官擎日傘而出未知何意而必是祈福之事也”
48) 張德順,「國文學通論」(서울:新丘文化社 1960), p. 279.
49) 民俗學硏究所編,「民俗學辭典」(東京:東京堂, 1970), pp. 53~54.14

 

 

 

 

 

급하였다. 海歌와 龜旨峯迎神歌)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先學들이 關係를 논한 바 있다. 原文을 引用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해가 [海歌]
1 龜乎龜乎出水路
2 掠人婦女罪何極
3 汝若房逆不出獻
4 入網捕掠燔之喫

구지가 [旨歌]
1 龜何龜何
2 首其顯也
3 若不現也
4 燔灼而喫也

1의 龜何와 龜乎는 같은 형태로 보이는데 龜는 '鬼'나 '神'을 뜻하는 音借라 한다.

2는 권고적인 상황이다. 掘峯撮土와 以杖打岸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3은 ''字가 의미하듯이 위협적인 文脈이다. 獻과 現의 대응을 볼 수 있다.

4는 '燔'과 '喫'의 중복이다. 그러면 龜와 燔의 관계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甲骨文을 통한 呪術行爲 중에서 甲은 甲을 지칭한 것으로, 불로 지져서 吉凶을 판단하던 古代人의 思考와 呪術性이 梅歌에서는 衆口鑠 金으로 그리고 龍 대신 로 부르게 되었다.

梅歌는 呪歌로 정의되어 왔다. 그래서 獻花歌와는 다른 쟝르로 생각되기도 하고 그 文體 역시 鄕札과 漢文,誓記體로 混用되어 있다. 더우기 1句 7字의 漢譯歌로 보기도 하였다.

“宗教的 呪術을 情味하며 歌之云,作歌唱 云云이란 것을 보아 그 當時 부르

50) 「三國遺事」卷第二,駕洛國記條 “開關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浴之日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 若十朋 伏之狀 故云也) 有殊常聲氣呼喚衆庶二三八人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 而發 其音日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又曰吾所在為何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 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爲君后故降 等須掘頂撮土 歌之云...以之蹈 舞 則是迎大王 歌喜踴躍之也”
51) 이러한 勸告的命的 상황을 Frazer는 '類似의 法則(Law of Similarity)'이라 하였다. J.G. Frazer, The Golden Bough(Abridge edition), London,
1967, p. 16. 참조.
52) 金炳旭, “韓國上代詩歌와 呪詞" p. 155. “海歌와 龜旨歌는 人間意志의 한 表 現이다. 그것은 또한 對立과 葛藤을 調停하는 中和的作用을 한다. 對立과 葛 의 生生力을 통해 神의 出現을 촉구하고 그 犧牲儀式의 喚起力을 作表한다. 으로 極된 感情을 이들 詩歌에 실어 突破ᄆ를 마련한다. 龜旨歌는 거북 海歌는 잡혀간 水路, 잡혀갈지도 모르는 水路에 대한 護身符다"는 설명은 적절하다.

 

 

 

 

 


덤불이 우거져야 도깨비도 모여든다
떡 사줄 놈 생각지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
도마에 오른 고기
도적 맞으려면 개도 아니 짓는다
도적의 때는 벗어도 환영에 때는 못 벗는다
도적놈이 제 발이 저린다
독 안에 든 쥐
돌은 차면 제 발만 아프다
돌지고 방아찧는다
동대문 밖은 강릉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뜨거운 국에 맛 모른다
드는 줄은 알아도 나는 줄은 모른다 불어 그
드문드문 걸어도 황소걸음
들으면 병 안들으면 약
등잔 밑이 어둡다

(ㅁ) 만나자 이별
말많은 집에 장맛이 쓰다
말은 보태고 떡은 멘다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다
망건 쓰다 장파한다
매부 밥 그릇이 커 보인다
매끝에 情든다
며느리가 미우면 발뒷꿈치가 달걀 같다
며느리가 미우면 손자까지 밉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
못난 일가 촌수만 높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
못된 일가 항렬만 높다

 

 

 

 

 

긴 저에 나무꾼 노래 들리네
楓湖에 핀 꽃자랑스럽고
道洞에는 밥짓는 연기 퍼졌네

※<楓湖愛蓮>은 楓湖에 연꽃이 피면 科擧의 及弟者가 나온다는 吉兆로 믿어왔다 함.

○ 강동면

노루목
강동면 임곡리에 <노루목>이라는 산고개가 있다. 이 <노루목>을 <손우재>라고도 한다. <손우재>라 불리우는 것은 옛날 이곳에는 범을 비롯한 많은 맹수가 번식하여 猛獸捕捉도구인 <손우>를 놓아 ᄉ 및 가축의 피해를 막은 데 기인한다. 그 후에 慶州金氏가 이 산(主된 山줄기)의 猛虎出林形에 묘소를 정하고 인근에 있는 이 재의 形狀이 노루와 같다 하여 <노루목>재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불하산(佛下山 또는 不下山)
강동면 下洞 3리 楓湖 북방 바다에 접해 있는 산으로 佛下山 또는 山으로 불리운다. 佛下山으로 쓰는 까닭은 이 산의 북방 2km지점에 위치한 新羅古刹 寒松寺를 세울 때 큰 부처가 이곳에 나렸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다. 한편 不下山 主嶺太白山脈에서 東海로 뻗는 落脈 <虎藏골>에서 끊어지고 이 산으로 연결되는 산줄기가 없이 홀로 솟은 산이라 쓴다는 것이다.

뙈치(X田里)
강동면 모전리의 民間이름이다. 이곳은 옛부터 잔디가 많고 또 잘 자라는 곳이어서 부쳐진 이름이다. 잔디를 이 지방에서는 <뛰>또는 <떼>라고 부르는데<뛰밭>( 田)이 <뙈>로 굳어진것 같다.

짚일(谷)
강동면 강동진리 남쪽 바닷가의 마을이다.이 부락 뒷산은 남쪽으로 높 다랗게 뻗은 산줄기가 있고 이 山嶺의 東便은 해면에서 1백여미터 높이

 

 

 

 

 


의 주변하고 넓은 高原을 이루면서 바다와 斷崖를 이루고 있다. 이 高原地帶에서 1백미터 가까운 깊이로 푹 파인 좁고 긴 골에 형성된 마을이 <짚일>이다. <짚일>은 깊은 골(深谷)이라는 뜻인데 <짚다>는 깊다의 이 지방 사투리이다.

새목(鳥項)
강동면 하시동2리의 마을이다. 이 곳 지형이 새목(鳥項)모양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옥골(谷)
강동면 상시에 <옥골> 마을이 있다. 이 마을과 마주 보이는 山(案山)이 龍山이다. 용이 마주보는 곳이니 용이 如意珠를 문 格이라 하며 玉 즉 如意珠라 는 뜻에서 이 이름이 생겼다 한다.

내맬골(梅谷)
강동면 상시동에 있는 부락이다. <내맬골>을 <梅谷>으로 漢字記 名하는데 咸陽朴氏(朴致格)가 所定한 墓地가 風水說上 梅花落地形인데서 온 이름이라 한다.

거북골(谷)
강동면 상시동1리의 마을이름이다. 주변산세가 거북形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나무골(舟谷)
강동면 하시동1리 마을의 이름이다.이 마을에 있는 江陵朴氏의 묘지가 배를 나무에 매어 걸어 놓은 형국 즉 舟形이라 하여 배(舟)와 나무(木)라는 뜻에서 <배나무골>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돗골(道洞)
강동면 하시동2리에 道洞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李朝 宣祖때의 朱子 學者로 禮曹參議, 大司諫을 지낸 白麓 應時의 아우로 判官벼슬을 한 應의 後孫인 博이 살고 있었다. XX은 그의 先鎣이 경기도 양주군 도봉산에 있는데 先祖를 추모하는 뜻에서 自己 住居地를 道峯山의<道>를 따서<道洞>이라 부르고 後山을 <道峯>이라 부르던 것이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당골
강동면사무소 소재지 동녁골을 <書堂골>이라 부른다. 옛날 이 마을

 

 

 

 

 

 


에 康氏 姓을 가진 한문선생이 面內의 유생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모든 비용도 自擔하였다 한다. 그로부터 이곳을 <書堂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後日 門下生들이 보 답하기 위해 位土(祭禮費用을 마련하기 위한 土地)를 구입하고 墓祭도 지성껏 지냈다 한다. 墓는 上洞 共同墓地에 있는데 甲坐다.

詩洞
詩洞은 명주군 강동면에 있는 동명으로 지금은 行政區域으로 上詩洞里 와下洞里로 나누어져 있다. 詩洞은 원래 寺洞이었다 한다. 鄕賢의 한 분인 三可 차의 에 朴震楷(號 元下堂)라는 사람이 있었다.1639년 仁祖己卯에 進士에 오른 선비이다. 楷는 원래 강동면 안인동에서 살았으나 그곳이 마음에 들지않아 詩洞의 前名인 寺洞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주한 지명이 <절골>이란 寺洞이었기 때문에 寺에 言을 부쳐<詩洞>으로 부르게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한다. 시동의 前名이 寺洞 즉<절골>이기 때문에 어느때 어느 곳인지는 몰라도 절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즉 시동마을에는 <승방골>(僧房谷)과 바랑골(背囊谷)의 洞名이 있고 또 이웃하여 佛下山의 山名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妄想이 되지는 않을것 같다.

眞遞地
茅田里의 上村을 <眞遯地>라고 부른다.江陵金氏에 誠이란 사람이 있다. 養誠은 1627년 李仁祖때 文科에 及弟하여 甕津府使司僕寺 正과 奉常僉正을 지낸바 있으나 그 후 뜻한바 있어 司諫副承旨의 벼슬을 받지 아니하고 고향에 내려와 이곳에서 숨어 살면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하여 <참된 숨어살던 곳>이라는 뜻으로 이 곳 사 람들은 <眞遯地>라고 부르고 있다.

假遞地
茅田上村의 <眞遯地>와 대칭되는 지명이 있다. <假遯地>는 구정면 언별에 있는 마을이름으로 眞遯地와는 1km 내외의 거리에 있다. 이 곳을 <假遯地>로 불리게 된 연유는 옛날 이곳에 李參議라는 사람이 은거하고 있었다 한다. 李XX는 이웃 마을 X田 上村에서 역시 隱遁生活을 하고 있던 金誠과 詩文으로 交分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런데 숲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데서 地라 하고 이에 반해 李參議는 다시 벼슬길에 올라 이곳을 떠났다 하여 <잠시 숨어살던

 

 

 

 

 

곳>이라는 뜻에서 <假遯地>라 부른다고 한다.

숩실(林谷)
현 강동면 임곡리는 민간지명으로 <숩실>로 불리어 오고 있다. 林谷은 民間地名인<숩실>을 숲(林)과 일(谷)로 漢字化 하여 붙인 이름이다. 강동면 모전에서 임곡으로 가는 「아울」에 옛날 氏가 모 소를 잡았는데 그 곳의 形局이 形 즉 바늘모양이라는 것이다. 그래 서 風水(地官)의 말이 바늘이 있는 곳에는 실(絲)이 있어야 하듯이 明氣가 난다하여 마을 이름을 <숩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숩실>(林谷) 마을에 처음 들어와 산 사람은 新安朱氏, 江陵成氏 등 3姓이라 하며 임진왜란때 이 곳에서 피신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한 다. (江東面 林谷里 趙英吉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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